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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D타입 (10,000자~)

1차 / 동양풍 / HL / 까마귀_20.12.23

by 샤_ 2021. 1. 8.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비아는 제 치맛자락을 땅에서부터 살짝 들어 올린 채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본래라면 이 길을 서화와 함께 느긋하게 올라왔을 텐데. 비아는 서화 생각에 조금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으로 아아 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이 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높아. 중턱에 있는 들판까지 가는 게 이렇게 힘이 든다니. 아 물론 힘들다는 건 대충 내어보는 소리다. 말동무 하나 없이 산을 오르니 비아는 대충 아무런 말을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으며 아아아 거릴 수밖에.

 

요 며칠 비가 오고 날은 겨울이 다가와 추워졌고, 이래저래 날씨 변화로 인해 밖에 자주 못 나가던 비아는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좋아진 날씨에 서화에게 함께 산 중턱에 있는 들판에 가자고 졸라댔다. 물론 지금 비아 옆에 서화가 없는 걸 봐서 당연하겠지만 서화는 이미 약속이 있던 참이었다. 그것도 아침 일찍 검무 연습을. 다른 이와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서화는 오늘 나가서 개인적인 일들을 보기로 했던 날이라 애초에 되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런 서화에게 계속 매달리기엔 비아도 미안해지니 알았다며, 대신 오는 길에 맛있는 다과라도 사 오라며 그를 보내줬었다. 그러니 이리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며 산을 오르지. 비아는 언제 도착할까, 대충 눈대중으로 높이를 계산하며 오르던 중, 그런 비아의 어깨를 누군가가 팍 치며 내려갔다.

 

“아!”

 

그 덕에 살짝 틀어진 저고리에, 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 어깨를 문질렀고, 그 상태로 자신을 친 이를 보았다. 분명 비아의 어깨를 친 이는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옆에는 또 다른 이도 하나 있었다. 일행인가. 근데 왜 저리 급하게 뛰어가는 거지? 비아는 제 어깨가 밀쳐졌을 때 잠시, 그것도 아주 순간적으로 마주친 상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바빠도 사과는 해줘야지! 아, 그래도 문신 좀 멋지던데, 들판 들렸다가 나도 아주 어? 저잣거리 끝자락에 있는 이 씨한테 팔 한 짝을 맡겨버려? 아, 근데 좀 안 어울리겠네.”

 

비아는 어느새 미간을 풀고 제 한쪽 팔에 새겨질 문신을 생각했다가 제 얼굴과 어울리지 못할 문신 생각에 손사래를 치며 고갤 저었다. 틀어진 저고리를 바로 고치고, 제 손에 들린 천과 함께 다시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래도 사과는 해주지. 비아는 딱히 아프지는 않지만 살짝 찝찝한 어깨를 바라보다, 제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 머리카락. 꽤 있는 거리의 나무 사이에서 보이는 한 익숙한 머리카락 색에, 비아는 단숨에 그 주인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이 마을에 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한 명뿐이니.

 

“정휘!”

 

비아의 부름에 정휘는 잠시 고갤 이리저리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다, 저 너머에서 먼저 다가오는 비아 덕에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비아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고, 정휘는 올라타 있던 말에서 내려와 비아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요, 비아낭자. 저 너머에서 절 알아보신 건가요?”

 

정휘는 아무리 봐도 저 너머에서 자신을 알아차리고 인사를 먼저 건넨 비아가 신기한 듯 물었다. 비아는 입꼬릴 올려 웃어주며 자신의 눈이 워낙 탁월한 덕이라며 답했다. 그는 비아의 대답에 고갤 끄덕이며 홀로 온 비아를 보고 고갤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혼자 이 산엔 무슨 일이신가요?

 

“아, 아시다시피 요즈음 날씨가 워낙 난리였다가 오늘은 날이 좋아서 혼자 산 중턱에 있는 들판에 나들이나 와봤어! 그나저나 정휘는 이쯤이면 궁에 있을 때 아닌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비아의 물음에 정휘는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어 답해줬다.

 

“오늘 새벽에 옥에 가둬둔 자들이 탈옥해서 잡기 위해, 궁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탈옥? 와, 그 삼엄한 곳을 어떻게 뚫었대?”

“워낙 그자들의 수가 독한지라 새벽에 보초를 섰던 무관이 당해버렸더군요. 근데 그곳이 삼엄한 곳인 걸 비아낭자가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어어, 약간 궁의 옥이라면 당연히 그런 느낌이니까 그렇지. 그래서 둘은 잡았어?”

“아뇨, 이 산이 워낙 넓고 높은 편이라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두 명이신 걸 아시는 건가요?”

“아아, 아까 마주쳐서.”

“네?”

“아까 되게 빠르게 도망가던데. 어우, 얼마나 잘 뛰던지. 뭣하면 내가 도와줄까? 나 날 줄 알잖아!”

 

비아는 아까 마주쳤던 두 명을 떠올렸다. 어쩐지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고 있더라니. 고문당한 흔적이었나 보네. 비아의 말에 정휘는 고갤 저으며 위험하다며 괜찮다고 거절했다. 비아는 정휘의 거절에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천을 제 저고리 안에 밀어 넣으며 괜찮다고,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주친 이들이 그자들이 맞는지 확실치 않기도 하고, 이 일은 궁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어찌 귀한 백성이신 비아낭자께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그 말에 비아는 입꼬릴 한껏 올리다, 숨을 잠시 들이켰다. 그리곤 단숨에 큰 까마귀의 형태로 변하곤, 까마귀로 변해 조금 틀어진 듯한 목소리로 정휘에게 말했다.

 

“한 놈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한 놈은 얼굴의 문신이 아주 탐나게 멋지다면 맞지 않을까? 그리고 귀한 백성이라 함은, 궁 안의 자들도 포함인 것을. 그렇다면 정휘도 귀한 백성인걸? 아, 물론 명을 받은 장본인이긴 하다만.”

 

할 말을 대충 다 끝냈는지 비아는 정휘가 더 말리기 전에 단숨에 하늘 위로 올랐다. 어차피 말렸어도 이미 자신이 도와주겠노라고 확고해진 비아를 누가 말리겠다마는. 게다가 비아는 현재 서화도 없이 혼자 나들이를 온 이 따분한 시점에서 이런 재밌어 보이는 일을 어떻게 놓치고만 있겠는가. 비아는 빠른 속도로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제 눈가에 힘을 줬다. 한 시진 안으로 찾아내 버려야지. 비아는 지루했던 참에 들어온 재밌는 일에, 평소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산을 가로질렀다.

 

 

 

***

 

 

 

대충 산 아래 부근을 다 돌아 산 중턱 즈음에 오자, 비아의 시야에 익숙한 뒤통수 두 개가 보였다. 한 시진은 무슨, 생각보다 얼마 도망가지도 못했구만? 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에 입꼬릴 한껏 올려 웃으며 자연스레 그들의 뒤에 착지했다. 숨 한번 들이켜며 땅에 비아의 발이 닿자, 비아는 까마귀에서 다시 적색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인간으로 변했다. 비아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쥐어 열심히 산을 내달리는 그들의 옆에 속도를 맞춰 달리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대로만 가면 들키지 않고 두 시진 안에 도착할 거야. 도착하면 바로 최 씨가 준비해뒀다는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항구로 넘어가면 돼.”

“최 씨가 양반가의 패를 사들였다더군. 그걸 우리에게 완전히 넘겨만 준다면 우린 새 땅에서 양반 소리나 들으며 사는 거라고!”

“진짜? 어디 양반가의 패를 사들였어? 우리 가문이랑 가까운 유 씨는 어때?”

“유 씨? 유 씨랑 가까운 가문이라면……. 아니, 네 놈은 누구냐?”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껴 대화를 이어가려던 비아의 계획은 아쉽게 끝이 나버렸다. 그제야 자신의 옆에서 함께 뛰던 비아를 발견한 그들은 살짝 뒤로 물러나, 비아를 경계했다. 비아는 두 손을 펼쳐 그들을 진정시키며 고갤 저었다.

 

“아냐, 진정해. 나는 그저 그대들과 대화 나누고 싶어서 와본 것이야.”

“뛰면서? 그것도 기척 없이 갑자기?”

“네 놈, 무슨 목적인지 말해라. 어떻게 이리 기척 없이 붙은 거지?”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허리춤에 걸어둔 검갑에서 검을 빼내어, 비아를 향해 겨누었다. 비아는 여유롭게 그의 검이 위협되지 않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과 그들의 앞에 있는 웬 동굴과 근처에서 나는 피비린내, 그리고 제게 검을 겨눈 사내의 뒤에 있는 꺾인 나무 다섯 그루. 여기 뭔가 익숙한데, 왜지? 제 검에 동요는커녕 주변이나 돌아보는 비아가 어이없어 혼자 이런저런 말로 협박을 해대던 사내의 어깨 쪽으로 웬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아는 그의 어깨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그제야 뭔가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래! 생각해보니까 여기 곰 출몰지네!”

 

비아의 말과 함께 사내의 어깨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세 명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봤다. 누가 봐도 참 잘 자란 곰 세 마리가 사내의 뒤에 있었고, 세 명은 딱히 별말을 안했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셋은 동시에 반대편으로 냅다 뛰었고 그런 셋을 따라 곰 세 마리도 함께 뛰기 시작했다.

 

“어머, 애들아. 쟤네 봐! 가족인 것 같아. 중간에 아기곰, 가슴에 흰 털이 살짝 보이는 곰이 엄마 곰, 눈이 초롱초롱한 곰이 아빠 곰.”

“너 아주, 이젠 말 편하게, 놓네? 제발, 입 좀, 다물어헉!”

“너, 왜 이렇게, 태연, 해?”

“너희가 저 곰 가족보다 더 큰 요괴한테 도망가본 적 있어? 난 있어. 그게 말이야? 언제냐, 좀 됐는데 나랑 서화가 지금과의 관계가 아닐 때 같이 숲에서…….”

“다신, 너한테 뭐 안 물을게, 제발, 조용히 좀, 해봐학.”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살기 위해 뛰는 그들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에게 속도를 맞춰 조금 느긋하게 달리는 비아에겐 딱히 곰 정도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뭣하면 날아가 버리면 장땡인걸. 다만 이렇게 뛰어다닐지 모르고 치마를 입은 것이 꽤 불편하지만. 그들은 도망자 처지라 도움도 못 청하고 하다못해 속 시원하게 비명도 못 지르니 답답해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비아는 그런 그들을 재밌다는 듯 구경했다. 그런 비아를 보며 뭔가 이상함을 느낀 얼굴의 문신이 인상적인 자가 숨을 몰아쉬며 비아에게 물었다.

 

“야, 너, 아무리 봐도, 귀한 양반댁 여식에, 이런 상황에서, 여유 있는 걸, 보니, 우리 버리고 가버려도, 되는데 왜, 여기서 우리랑 같이, 달리기나 하는 거지?”

 

쉬지 않고 뛰던 탓에 숨이 꽤 찼는지 말할 때마다 가쁘게 말하던 그의 말이 끝나자, 비아는 딱히 뭔가 고민 같은 건 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 나 너네 다시 옥에 넣어줘야 해서 어쩔 수 없어.”

“뭐?”

 

태연한 비아의 말에 문신을 가진 자는 살짝 떨어져서 뛰었고, 수염이 덥수룩한 자는 낮은 목소리에서 갑자기 목소릴 까마귀처럼 높여 뭐? 라며 소리쳤다. 그리곤 아까 검갑에 도로 넣었던 검을 빼내어 그 자리에 서서, 다시 비아에게 검을 겨눴다.

 

“어, 너 지금 멈추면 안 되는…….”

“입 다물어! 젠장, 저 곰들 따돌리느라 힘 빠진 우릴 처리하려고 있던 거였어! 지금 이 자리에서 널 먼저 처리하고 저 곰들은 따돌려버…….”

 

비아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 단숨에 검을 겨누던 그는 발도 단숨에 땅에서 멀어졌다. 그가 열심히 구구절절 말하고 검을 겨누는 사이에 곰들은 그를 잡아버렸고, 그는 그렇게 속으로 원하던 비명을 그제야 질렀다. 물론 딱 2초 정도 지르고 곰 가족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지만. 한순간에 이 인조에서 일 인조가 되어버린 그와 비아는 딱히 더 입을 열지 않고 다시 반대편으로 뛰었다. 비아는 아까 잠시나마 곰에게 잡혀버린 그를 구해줄까,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저렇게 참 잘 자라준 곰 세 마리를 무기 하나 없는 상태에서 처리하긴 힘들어 생각을 도로 접었다.

 

두 사람은 어쩌다 보니 미끼가 되어준 수염 덥수룩한 자 덕에 곰을 완전히 따돌렸고, 숨을 고르던 일 인조는 비아에게 자신의 검을 겨눴다. 비아는 순식간에 제 목에 닿은 칼날을 바라봤다. 차가운 칼날과 숨 한 번 고르자마자 떨림 없이 검을 겨누는 상대를 유심히 바라보던 비아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숨을 내쉬었다.

 

“네 덕에 동료 놈 하나 잃었으니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한다는 건 알겠지.”

“내 탓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마는, 미안하지만 넌 나 못 죽여.”

“자신 있나 봐? 검 하나 없는 귀한 양반댁 여식이 뭘 하겠다며 그러는지. 아님 품속에 작은 검이라도 있나?”

“아쉽지만 품에는 찻잎 감쌀 천 한 장이랑 들판에서 혼자 먹으려던 다과 하나뿐이야. 그리고 아까부터 양반, 양반 거리는데 나 양반댁 여식도, 그렇다고 양반도 아니야. 아, 그래도 맞는 건 하나 있다. 자신은 있어!”

 

비아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내던 자는 비아의 목에 칼날을 더 깊게 밀어댔다. 조금만 더 깊으면 살이 베일 정도였다. 비아는 그런 그의 웃음을 보고 따라 입꼬릴 올려 웃어주며 숨을 짧게 들이켰다. 문신한 자의 눈꺼풀이 빠르게 감겼다 다시 떠지자, 비아는 다시 까마귀의 모습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꽤 당황했는지 순식간에 몸이 굳었고 비아는 그런 그의 손을 날개로 툭 쳐, 검을 물고 저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는 순식간에 검도 사라지고 상대는 까마귀가 되어 자신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며 정신 차리라며 오히려 응원해주는 상황에,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비아에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고...”

“뭐라고? 잘 안 들려!”

“...니까…. 내려오라고...”

“뭐? 미안, 여기선 잘 안들린다야!”

“아! 내가 졌으니까 내 머리 위에서 내려오라고!”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서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던 비아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머리에서 내려오곤, 곧바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한껏 올린 입꼬리를 그에게 내보였다. 비아는 망연자실한 듯한 그의 축 처진 어깨에 제 팔을 두르고 자연스럽게 앞으로 걸으며 그에게 말해줬다.

 

“뭘 그리 축 처졌어.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너 혹시 좋아하는 음식 있냐?”

“왜, 옥에다가 집어넣고 사형 직전에 가져다주게?”

“아니? 너 밥 사주게. 딱히 좋아하는 거 없으면 저기 산 아래 저잣거리에 국밥집 하나 있어. 거기 주모가 국밥을 되게 잘 말아주시니까, 다음에 한 번 나랑 가자. 내가 사줄게!”

“너...!”

“우리 그래도 함께 산을 뛰어다닌 사이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비아는 제 저고리 속에 숨겨둔 천 하나를 꺼냈고, 그 천을 펼쳐 그 안에 있는 동그랗고 납작한 다과 하나를 그의 손에 쥐여줬다. 배고프지, 이거라도 먼저 먹어.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밥이나 사준다는 비아의 말에 문신 한 자는 감동이라도 한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아를 바라봤다. 비아는 그런 그에게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 고갤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감싼 채 산을 올랐다. 그는 비아에게 받은 다과를 품에 넣으며 비아를 따라 산을 올랐다.

 

“그런데 저잣거리라면 저 아래인데 왜 산을 오르는 것이냐?”

“아, 내 벗들이 너 기다려. 내 벗들 다 보고 밥 먹자.”

“벗? 그 벗들은 왜 이 시간에 산에서 날 기다리는 거지?”

 

그의 물음에 비아는 저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 무리에 답 대신 그의 어깨를 더 끌어안아 주며 고개만 끄덕였다. 비아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를 넘겨줬다. 문신을 한 자는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눈만 끔뻑였고, 그가 상황 파악을 끝냈을 땐 이미 자신의 손은 끈으로 포박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발까지 포박하려는 자들에게서 몸부림치며 비아에게 소리란 소리는 다 질러댔다.

 

“이, 이...! 야! 너! 어떻게 인간이라는 게 그러냐?! 밥 사준다며! 걱정하지 말라며!”

“탈옥 한 번만 더 하면 사줄게. 그리고 나 인간은 아닌데. 아이참, 너무 흥분하지 마. 다음에 탈옥하면 진짜 밥 한 끼 사줄게! 그리고 너 좀 마음에 들었어. 탈옥 제대로 해내면 내가 일자리도 줄게! 알았지?”

 

그렇게 시끄럽게 한참을 소리 지르던 그는 무관들에게 끌려갔다. 비아는 귓속에 검지를 넣어 대충 후비며 시끄러운 고함에 먹먹해진 귀를 털어냈다. 정휘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지, 산 위에서 내려오며 비아를 불렀다. 비아는 정휘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릴 올렸고, 정휘는 그런 비아의 앞에 말을 세워 내렸다.

 

“어때? 내 실력?”

“덕분에 빨리 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아의 으쓱임에 정휘는 고갤 살짝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다 정휘는 고갤 다시 들어 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그자 주변에 다른 자는 없었나요? 그자들은 늘 둘이서 딱 달라붙어 있는 걸로 아는데 한 놈만 잡혔다고 들어서요.”

“그... 이것도 잡은 걸로 쳐주나 모르겠는데 저어기 아래에 곰 자주 출몰한다는 곳. 저기에 있을 거야. 아 근데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곰이 뼈는 안 먹는다고 서적에서 봐서.”

“아.”

 

비아의 말에 정휘는 단번에 알아듣고 고갤 끄덕였다. 정휘는 그래도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여 다행이라는 말을 건네려던 때, 비아의 해진 저고리 소매가 시야에 들어섰다. 손이라도 다치셨나, 싶어 정휘가 눈길을 건네자 비아는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쳐줬다.

 

“이건 내가 이 저고리를 좋아해서 하도 오래 입어 해진 거야. 다친 곳은 없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아, 다행이군요. 어찌 되었든 덕분에 죄인 둘을 모두 잡게 되었으니, 적어도 사례는 해드리고 싶습니다.”

“딱히 그런 거 바라고 한 건 아닌데.”

“어차피 이 일을 윗선에 말을 올리게 될 테고, 그렇다면 적어도 포상을 취하실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제 나름의 사례는 적어도 해드리는 것이 파견 나온 책임자의 도리이지요.”

 

정휘의 말에 비아는 잠시는 턱을 문지르며 적당한 사례라는 것을 고민했다. 자신이 계속 거부한다고 해도 도리라는 건 확실히 해야 하는 그이기에, 비아는 거절 대신 적당한 사례를 골랐다. 아무래도 상대가 그이기에, 쉽게 고르지 못했던 비아는 제 배 속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턱을 문지르던 손을 뗐다. 그리곤 결정했는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 쪽으로 몸을 틀어버리며 말했다.

 

“해가 벌써 저기까지 올랐다는 건 밥 먹을 시간이라는 거지. 밥 한 끼 사주는 걸로! 어때?”

 

비아의 말에 정휘는 어느새 저 높이 끝 해를 보고 고갤 끄덕이며 대답 대신 말 위에 올라타, 비아의 걸음 속도에 맞춰 말을 몰았다.

 

 

 

***

 

 

 

“아, 혀 데였어.”

“많이 배고프셨나 봅니다.”

“일어나자마자 오늘 한 게 산 타기랑 뛰기뿐이라 음식 보자마자 잠시 이성이 나갔나 봐.”

 

비아는 주막을 걸어 나오며 국에 데여 까슬까슬한 듯한 느낌의 혀에 손부채질을 했다. 정휘는 비아를 따라 나오며 뭔가 덜 해결 된 듯한 찝찝함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비아에게 물었다.

 

“정말 사례로 이거면 괜찮으신가요?”

 

정휘는 비아에게 사례로 대접하는 밥, 기왕이면 더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비아는 괜찮다며 국밥이나 먹자고 그를 주막으로 끌고 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아의 공은 이 정도 사례로 끝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고 판단한 정휘는 비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비아는 정휘의 물음에 잠시 생각했다. 평소의 비아라면 차라리 더 좋은 것을 사례로 준다 하면 마다하지 않고 받겠다마는, 상대가 유정휘이니 비아는 이마저도 꽤 고민하고 정한 것이었다.

 

서화와 그리 좋지 못한 관계의 사람에게 받는 사례는 자신도 나름 눈치 보이는 것이니 빠르게 먹고 헤어지기 쉬운 국밥으로 골랐던 것인데. 그래도 그의 성격과 위치를 생각하면 저 물음이 당연하였다. 정휘의 성격상 당연히 제 공에 맞지 않은 사례를 하고 끝내기에는 아무리 관계를 따지더라도 도리가 아니라 찝찝하겠지. 비아는 이것저것 다 생각하며 고르고 고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휘에게 받을 만한 적당한 사례가 떠오르지 않자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어버렸다.

 

“그...러면! 다음에 마주치면 먼저 인사해 줘. 그거면 돼!”

 

비아의 말에 정휘는 비아도 나름 꽤 고민한 것이 느껴졌는지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 정휘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묵례했고, 비아는 그를 따라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했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배고픈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오늘 저잣거리에 들린다는 서화를 마주칠 수 있으니 평소보다 더 빨리 먹던 것도 있었던지라, 비아는 조금 더부룩한 속을 달래며 몸을 뒤로 틀었다. 들판은 나중에 가야겠어. 지금은 힘없어서 당장은 못 가겠다. 비아는 기지개를 피며 살짝 숙였던 고갤 들었다. 시선은 사람들의 허리에서 자연스럽게 저 너머로 이어졌다. 그러다 제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비아는 순간적으로 눈가에 힘을 줬다.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손끝이 잠시 굳어졌다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저 위에서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에, 비아는 짧게 생각했다. 나, 그래도 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그건 오늘은 아닌가 봐. 비아는 뻣뻣해진 얼굴을 급하게 풀어내, 한 손을 번쩍 들어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익숙한 그 얼굴을 향해.

 

“서화!”

 

 

 

***

 

 

 

왜 서운하지. 비아는 자신의 옆에서 비단을 고르는 서화의 옆모습만 흘끗 바라봤다. 서화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서화는 비아가 고갤 들기 전부터 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비아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서화는 비아의 예상과는 달리 딱히 별말 없이 그저 비단이나 골랐다. 비아는 평소처럼 말없이 할 일 하는 서화를 바라만 보다, 살짝 헛기침과 함께 서화의 어깨에 자신의 턱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웬 비단을 사러 온 거야? 전에도 사놓지 않았나?”

“아, 전에 사놓은 비단은 다 써서요.”

 

서화의 짧고 명료한 답에 비아는 더 대화를 끌지도 못한 채, 고갤 끄덕이며 그저 비단을 고르는 서화만을 바라보길 계속했다. 이상하다. 그래도 평소 같으면 왜 정휘와 있던 거냐, 아님 하다못해 여긴 어쩐 일이냐 물어봐 줬는데. 비아는 그저 말없이 묵묵히 본인 할 일만 하는 서화에게 꽤 서운한 듯 미세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그러다 잠시 뭔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번엔 제 눈썹을 확 일그러트리며 잠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 서화의 쪽으로 등을 돌렸다. 비아는 제 앞에 걸린 푸른 비단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와, 방금 나 되게 좀 그렇네.”

 

서화와 정휘의 사이 뻔히 알면서도 정휘와 있던 주제에 서화가 신경 좀 안 써줬다고 바로 서운하다고 느끼는 꼴이라니. 비아는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 없다가 갑작스레 덮쳐온 제 서운한 감정에 오히려 본인만 더 상처 입어버린 듯했다. 정확히는 서운함을 느낀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어버린 꼴이니. 비아는 속으로 서화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5번 정도 외치고 제 두 뺨을 양손으로 짝, 하고 쳤다. 이럴 땐 생각을 떨쳐버리는 게 답이야. 비아는 점점 뭔가가 들어차는 머릿속을 한 번에 비워버리곤, 다시 뒤를 돌아 대충 살 비단을 다 고른 듯한 서화의 뒤를 끌어안았다. 서화는 갑자기 제자리에 서서 뭔갈 중얼거리더니 이젠 제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비아를 흘끗 보며, 넘어진다며 타일렀다. 비아는 제게 넘어진다며 타이르는 서화를 보자니 괜히 더 미안해져, 결국 혼자 앞뒤 다 자르고 말해버렸다.

 

“서화, 미안해.”

“갑자기 무슨 연유로 그러시는 건가요?”

“그냥 내가 미안해.”

“...연유는 모르겠다마는, 밖에서 계속 이렇게 제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시는 건 조금 삼가셨으면 합니다.”

 

비아는 서화의 말에 알겠다며 바로 그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어냈고, 서화는 그제야 주인장에게 비단의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서화에게서 받은 비단들을 확인하며 값을 매기던 주인장은 시선을 자신의 손에 들린 비단에서 서화의 얼굴로 천천히 올렸다. 서화의 얼굴을 쭉 훑어본 주인장은 비단의 값을 다 매겨놓곤, 그 값에서 사분의 일 정도 되는 값을 빼며 말했다.

 

“전에도 몇 번 얼굴을 본 것 같은데. 어느 양반가의 아씨이신 지는 모르겠다마는 참 고우시기도 하고, 몇 번 왔기도 했으니 이 정도는 빼 드려야지.”

 

서화의 얼굴이 슬슬 익숙해지던 주인장은 넉살 좋은 얼굴로 웃었고, 비아는 서화의 옆에서 기다리다가 주인장의 말에 이만큼이나 빼주냐며 몇 번을 되물었다. 그런 둘 사이에서 본래의 값만큼 빼놓았던 돈주머니를 쥔 서화는, 넉살 좋게 웃어주는 주인장을 향해 살짝 입꼬리만 올려주며 본래의 값 그대로 주인장에게 넘겨줬다. 그리곤 마음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도로 돈을 빼주려는 주인장을 피해, 비아와 함께 밖으로 바로 나왔다. 비아는 조금 아쉬운 듯한 얼굴로 주인장이 빼주려던 값을 계산하며 말했다.

 

“그 돈이면 저 너머 떡집의 떡만 한 바구니를 사 올 수 있는데.”

“아침에 오는 길에 다과라도 사 오라 하여, 떡은 이미 사뒀습니다.”

 

서화는 비아의 말에 자신의 짐을 넣어둔 보따리 사이에서 떡이 든 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비아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떡이 든 천 주머니를 올려주는 서화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기분이 좋아져 방금까지도 머릿속에 옅게 남아있던 생각이 아예 사라져버렸는지, 신이 나 어서 집에 돌아가자며 서화를 재촉했다. 서화는 떡 하나로 생각하던 걸 순식간에 날려버린 비아를 보고 살며시 한 쪽 입꼬릴 올려 웃어주며 비아의 걸음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

 

 

 

“정보상님, 전에는 비록 제가 한발 늦었다마는 이번에는 제가 더 빠르지 않겠나, 감히 예상해보지요. 최근에 죄인 두 명이 탈옥했던 일 아십니까? 그들의 배후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어엉, 최씨?”

“네! 최씨요! ...는 왜 아세요?”

“정보상한테 정보 좀 안다고 왜 아냐고 하는 것은 뭔 옆 서당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인 것이냐?”

 

비아는 얇은 적색 천 뒤에 있을 사내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 고갤 기울였다. 저잣거리 가장 깊숙한 골목의 세 번째 터에 있는 아주 작은 이곳은 정보상이다. 그 안에 들어서면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쌓인 책들과 반짝이는 금괴와 요상한 모양의 보석들이 줄을 섰고, 그것들을 피해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천장에 달린 총 10장의 적색 천들을 지나고서야 보이는 큰 병풍. 그 큰 병풍까지 넘어야 보이는 큰 상과 딱 가슴까지 가려지는 천장에 달린 마지막 적색 천. 그리고 그 너머에 앉아서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상 비아.

 

제 예상으론 꽤 큰 금액을 생각하고 정보를 팔려 온 듯한 사내의 얼굴이 천 너머로 훤히 보였다. 비아는 제 큰 오라버니에게 보낼 편지를 쓰던 것까지 멈추며 들었더니 이미 아는 정보에 꽤 실망한 듯, 상에 턱을 괴고 천 너머에 있을 사내에게 말했다.

 

“팔 거 더 없으면 어서 가. 선약 있어서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 하니.”

 

비아는 옆에 잠시 걸어뒀던 갓을 다시 머리 위에 얹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비아는 느슨해진 제 고름을 다시 꽉 묶으며 아직도 나가지 않고 뭔가 우물쭈물하는 사내를 흘끗 쳐다봤다. 뭔가 더 있나 본데? 얇은 천 너머로 비아가 정말 나갈 채비를 해버리자, 사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한 손을 번쩍 들어 잠시만! 이라며 소리쳤다. 비아는 사내가 뭔갈 더 말하기까지 기다리느라 고름을 풀었다 묶기를 반복하던 걸 멈췄다. 그리곤 곧바로 갓을 도로 바닥에 두고 사내에게 물었다.

 

“뭐가 더 있는가?”

“...여기 거래 후, 비밀 보장되는 것 맞죠?”

“아 그러니까 정보상이지!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들어보고 값을 매겨줄 테니.”

 

비아는 답답하게 말을 이리저리 끄는 사내가 슬슬 짜증이 났는지, 바닥에 뒀던 얇은 검은 천이 목까지 걸려있는 갓을 쓰고 천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곤 갑자기 들이댄 자신의 행동에 놀라 뒷걸음질을 한 사내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는 위태롭게 쌓인 서적들이 보였고 그 사이에서 비아는 거위 모양의 작은 금괴 하나를 집었다. 그리곤 희미하게 보일 검은 천 너머로 입꼬릴 한껏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말하면 이거 줄게. 이거면 이 물가 높은 한양에서도 흰쌀만 20가마는 필히 받겠지.”

 

사내는 제 눈앞에서 거위 모양의 금괴를 흔들며 어서 얘기해보라는 비아의 행동에, 결국 비아의 손에 들린 금괴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

 

“...탈옥했다는 자 중 특이한 문신을 한 자가 있습니다. 그놈 인간 아닙니다. 요괴인데 특이하게도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마치 인간도 늑대도 아닌 모습으로 사람들을 습격한답니다. 이 일로 피해 봤다던 곳이…….”

“탐라.”

 

사내의 말을 듣다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지 비아는 다시 천 너머로 고갤 집어넣고, 쌓아둔 서적들 사이에서 한 종이를 찾았다. 딱히 당장 필요해질 정보는 아니라 구겨진 채로 며칠 방치해놨던 종이였다. 비아는 구겨진 종이를 손으로 펴서 적힌 글을 다시 훑어보았다. 이 넓은 한양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수없이 봐온 문신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뭔가의 기시감인지, 아님 그저 정말 자신의 취향이었던 것인지, 며칠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그의 문신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비아는 한자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훑으며 읽다, 가장 아래쪽에 그려진 한 그림과 가장 마지막 줄에 적힌 한자를 보고서야 진득하게 엉킨 의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늑대인간이었어.”

 

인간의 몸으로 고작 숨 한 번 몰아쉬었다고 단숨에 진정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검을 겨눌 수 있던 것도. 머릿속에서 안 빠져나가던 그 늑대의 눈이 떠오르던 문신도. 비아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이 생겼던 그의 문신을 떠올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천 너머의 사내에게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오늘이…….”

“네, 오늘 맞습니다.”

 

비아는 사내의 답이 끝나자마자 바로 흐트러진 갓을 바로 쓰고, 쌓인 서적들 위에 올려진 거위 모양의 금괴 7개를 꺼내 사내의 품에 안겨줬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비아의 말에 사내는 고갤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아는 그가 만족스러워하는 걸 확인 한 후, 손에 쥐고 나온 종이를 곱게 접어 제품에 넣었다. 비아는 그제야 맞춰지는 기억과 기시감에 눈썹을 들썩였고, 그러다 그것들이 완전히 맞춰지자 제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온전히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자의 본래 집행일은 닷새 뒤고, 탈옥을 한 그 자의 집행일은 당연히 앞으로 당겨졌다. 그것도 보름달이 뜨는 오늘. 그자는 처음부터 비아조차 속였던 것이었다. 계획적으로 탈옥에 실패해 집행일을 앞당겼던 것이었다.

 

비아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 번에 정리되자마자 당장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벌써 해는 저물었고 겨울은 밤이 일찍 찾아오기 마련이니 아마 달이 완전히 뜨기까지 한 시진 남았겠지. 비아는 할 일이 생각 났는지 팔짱을 낀 팔을 풀었다. 그리곤 숨을 한번 들이켜 단숨에 까마귀로 변해, 하늘로 올랐다. 집행되기 전에 궁으로 가 정휘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될 거야.

 

 

 

***

 

 

 

“어... 그자라면 이미 사형장으로 이동했을 텐데요.”

“뭐?”

“네?”

“아니, 왜? 집행은 보통 궁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되는 게 아니었나?”

“아, 교수형의 경우는 저잣거리 중앙 근처에 있는 사형장에서 집행됩니다.”

 

비아는 정휘의 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늑대인간은 원래 머리가 좋은 건가? 저것까지 계산하고 탈옥했던 거야? 왜 하필 오늘 보름달이 뜨지? 내일로 못 미루나. 비아는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며 한순간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다급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휘는 갑자기 궁까지 자신을 찾아와 죄인의 위치를 묻고, 위치를 듣곤 한순간에 정신이 나가버린 비아의 이름을 부르며 비아의 이성을 깨웠다. 정휘의 부름에 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지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내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갑자기 궁까지 찾아오셔선 죄인의 위치를 여쭈시는 걸 보아하니, 뭔가 큰일이라고 생긴 듯하온데.”

“음... 아, 이걸 보면 별다른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긴 한데.”

 

비아는 자신의 품속에 고이 넣어둔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정휘에게 건넸다. 정휘는 비아가 준 종이를 받고 천천히 종이를 펼쳐 내용을 훑어봤다. 다른 사람이라면 뭔가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다마는, 상대가 유정휘라면…….

 

“아, 그러니까 찾으시는 죄인이 며칠 전에 탈옥을 시도했다가 무로 돌아가여 사형 집행일만 앞당겨진 자인데 알고 보니 그자는 자신의 처벌로 교수형이 내려질 것을 미리 알고 때마침 한양에서 제일 큰 저잣거리에서 축제가 열리는 오늘로 사형 집행일이 앞당겨지는 걸 계획한 늑대인간이라는 건가요?”

“의금부를 그만두시고 정보상이나 차리심이 어떤지 감히 여쭤봅니다.”

 

비아는 정휘의 완벽한 요약에 손뼉을 치며 고갤 마구 끄덕였고, 정휘는 아아 라는 소리와 함께 이해했다는 듯 고갤 살며시 흔들었다. 그런 두 사람의 고개는 동시에 멈췄다. 그리곤 정휘가 먼저 말을 가지러 뛰어가자마자 비아는 다시 까마귀로 변했다. 정휘는 이 일은 곧바로 한 무관에게 알리고 말을 타고 비아의 앞으로 달려왔다. 둘은 바로 궁 밖으로 나서는 길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어느새 하늘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한양 전체엔 축제를 알리는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비아는 등불들 사이사이를 스쳐 가며 뭔가 찝찝하게 잊고 있던 것을 이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축제가 시작되면 비아는 서화와의 약속으로 저잣거리 중앙에 가 있기로 약속했었다. 왜냐면 축제의 시작은 무희의 검무로 시작하는 것이 이 축제의 전통이니까. 이제야 떠오른 서화와의 약속과 그런 서화가 조금은 위험할 수 있단 생각에, 비아는 평소보다 더 속력을 냈다.

 

 

 

***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북소리가 저잣거리에 울려 퍼졌다. 고갤 숙인 채 저잣거리 중앙에 한쪽 무릎을 꿇은 서화가 제 짙은 분홍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분명 음악이 흐르기 전까지 중앙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한 비아가 보이지 않았다. 워낙 여기저기 잘 흘리고 다니는 이라곤 하지만, 자신과의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는 비아인걸 알기에 서화는 내심 속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길이라도 잃은 것이 아닐까. 아니지, 비아라면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떡 상인에게 달려가 또 떡을 왕창 사놓느라 늦는 걸지도. 서화의 눈동자는 빠르게 비아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비아에, 서화는 끝나가는 음악 소리에 맞춰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무희의 검무가 곧 시작됨을 알리는 북소리에 지나가는 이들 역시 너도나도 저잣거리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화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 틈에서 비아를 찾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비아를 찾던 눈동자를 제 허리춤에 걸린 두 검으로 돌렸다. 느릿한 손짓이 허리춤에 걸린 두 검을 빼 들자 자연스레 멈췄던 노랫소리가 다시 저잣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어디선가 음악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서화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서화의 귀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는지 중앙에 모여든 사람들은 저절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몇십 명의 고개가 단숨에 궁에서 가장 가까운 길목으로 꺾였다. 길목엔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과 상인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있는 줄 알고 고갤 돌렸던 사람들의 입에선 어수선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궁 쪽으로 말 한 마리가 중앙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갈색 털로 뒤덮인 말 위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웬 말 한 마리에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바라봤다. 점점 중앙으로 달려오는 말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지 입을 쉽사리 떼지 못했다. 어떤 미친놈이 축제 중앙으로 말을 끌고 와.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잠시 억눌린 듯, 모두가 그 큰 말 한 마리와 그 위 탄 두 사람만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깬 사람은 정휘의 뒤에 탄 비아였다.

 

“서화! 피해!”

 

비아의 외침과 동시에 반대편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땅의 울림은 발밑을 간질이듯 퍼지더니 빠르고, 또 크게 울려 퍼졌다. 서화는 그렇게 안 보이던 비아가 정휘의 말을 타고 제 눈앞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갑자기 피하라는 외침에, 저절로 미간을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런 서화의 생각에 대답해주듯 서화의 위에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날씨 하나는 참 좋은 날이었기에 아무리 해가 지더라도 갑작스레 먹구름이 밀려오긴 힘들었다. 서화는 찌푸려진 인상과 함께 제게 내려지던 달빛을 한순간에 앗아간 그림자의 정체를 향해 고갤 뒤로 돌렸다.

 

달빛을 한껏 머금어 빛나는 회색 털. 당장이라도 이곳을 집어삼킬 거라는 욕망이 들어찬 보름달과도 같은 눈동자. 두 발로는 서 있으나 사람의 형체도, 그나마 비슷해 보이는 개나 늑대의 완전한 형체도 아닌 것. 서화의 머릿속엔 며칠 전에 비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사투리로 말도 잘 안 통하던 탐라 사람이 건넨 어느 한 정보. 탐라의 여러 마을을 집어삼킨 ‘늑대인간’의 이야기가.

 

그의 앞에 서 있는 늑대인간은 제 자신을 앞에 두고도 도망가거나 피하지도 않고 뭔갈 생각하는 듯한 서화를 보며 회색 털로 뒤덮인 제 콧잔등을 한껏 찡그렸다. 그리곤 천천히 제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화의 검만 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고 그사이론 진득한 침이 새어 나왔다. 이를 드러낸 늑대인간은 천천히 한쪽 발을 들어 서화를 향해 내리찍었다.

 

 

 

***

 

 

 

낮게 깔린 등불은 비아의 검은 날개를 툭툭 쳐댔다. 그 덕에 점점 정휘의 말과 속도 차이가 나기 시작한 비아는, 결국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변하곤 정휘의 뒤에 착석했다. 그래도 늑대인간이 아직 보름달을 보진 못했나 봐. 아직은 낮게 떠 있는 보름달을 흘끗 쳐다보던 비아의 눈은 정휘의 옷자락을 쥔 제 손을 향했다. 검무는 이제 막 시작됐겠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직까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비아 제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아무리 당장은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아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인걸. 비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저잣거리 중앙에, 중심을 잡느라 숙였던 상체를 끌어올리듯 들어 올렸다.

 

그 어떤 금보다 더 빛날 법한 금안이 서화를 찾아 헤맸다. 중앙에서 이제 막 검을 빼낸 서화의 모습이 보이자, 비아는 안도감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서화! 피해!”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짧게 울리자, 비아는 손에 쥔 정휘의 옷자락을 더 꽉 쥐었다. 말은 울리는 땅에 순간적으로 멈춰버렸고 그 반동에 비아와 정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괜찮으십니까? 말이 잠시 놀란 것 같네요.”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서화한테…….”

 

쿵쿵쿵.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큰 울림이 제 발밑까지 다가왔다. 잠시 정휘에게 가 있던 비아의 눈은 다시 서화에게 돌려졌고, 그 밝은 금안에 비친 것은 서화의 쪽으로 달려오는 늑대인간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이 제 목구멍까지 가득 찬 기분이다. 턱턱 막혀오는 숨에, 비아는 속으로 제 자신을 진정시킬만한 말들을 되뇌었다. 정확히는 되뇌이고 싶었다. 평소의 비아라면 제 손끝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것이 여유였기에, 아무리 긴박한 순간이 와도 하다못해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서화에게 다다른 적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비아는 뒤이어 제게 뭐라 말하는 정휘의 말을 흘려보내며 바로 서화에게 달려갔다.

 

늑대인간의 수레만 한 발이 서화를 향해 다가간다. 비아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의 이름과 말들을 숨과 함께 들이키며 서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순간적으로 맞닿은 서화의 체온에, 비아는 그제야 목구멍에서 꾹꾹 막혔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화, 서화, 서화. 갑자기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비아로 인해 저절로 몸이 앞으로 밀려난 서화는 그대로 넘어지듯 휘청였다. 비아의 몸이 제게 완전히 닿아서야 정신을 차린 서화는 자신과 비아의 위를 덮쳐오려는 늑대인간의 발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내던졌다.

 

비아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옆으로 넘어진 서화는 비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고갤 들자마자 빠르게 비아를 훑어봤다. 한껏 내려간 눈썹과 눈꼬리, 그에 비해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비아의 몸에, 서화는 그제야 숨을 내뱉으며 자연스레 잡아버린 비아의 손을 풀었다. 비아는 걱정했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내뱉으면서도 밀려오는 안도감에 입꼬릴 슬슬 올렸다. 차가운 서화의 손과는 달리 따스한 비아의 손이 서화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늦어서 미안.”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서화는 제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그리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면서도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신경도 안 쓰는 비아의 머리카락을 따라 쓸어내려 줬다. 늦은 건 정말 상관없었다. 상관이 있는 거라곤 하나뿐이지. 두 사람이 서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느긋이 넘겨주던 때였다.

 

콰드득. 기분 나쁜 쇳소리에 두 사람은 저절로 소리가 나는 자신들의 위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위엔 칼 하나로 늑대인간의 발톱을 막아내는 정휘가 보였다. 정휘는 애써 눈웃음을 지어주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재회하신 건 축하드리기는 하다마는. 그래도 남은 재회는 이것부터 처리하고 하심이 어떠신가요?”

 

늑대인간의 무게를 혼자만의 힘으로 받쳐내는 게 슬슬 힘이 드는지 정휘의 눈웃음은 점점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비아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까마귀로 모습을 바꿨다. 짙은 밤하늘과도 같은 검은 날개, 그 겉에는 피가 흐르는 듯 스며든 적색 깃털. 비아는 늑대인간의 코앞까지 날아올라 시선을 분산시켰다. 덕분에 발톱 힘에 억눌리던 정휘는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아의 날갯짓은 정휘가 봐도 여유로움이 흘러넘쳤다. 그것도 자신의 몇십 배로 큰, 송곳니를 한껏 내민 늑대인간의 앞에서도.

 

정휘가 봤다시피 비아는 정말 여유가 순식간에 흐르기 시작했다. 얼음장처럼 꽝꽝 막혀있던 것이 부드럽게 넘쳐 오르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서화가 제 두 눈앞에 있는 데다가 그의 안전도 확인했으니 비아에겐 이젠 불안할 것도 없었다. 비아가 늑대인간의 노리개가 된 것처럼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정휘는 말을 타고 주변 사람들을 모두 궁 쪽으로 대피시켰다. 서화는 그런 비아와 정휘를 보며 제 두 손에 들린 검을 더 꽉 쥐었다. 아까와는 달리 서화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비치지 않았다. 숨도 안정적이고 검을 든 두 손마저도 여유로움이 흘러넘쳤다. 마치 평소의 서화처럼.

 

하지만 그것은 서화가 잘하는 ‘척‘일뿐. 어딘가 저릿한 통증이 제 가슴부터 시작해서 손끝까지 퍼져나갔다. 살면서 딱히 이런 통증을 느껴 본 적은 없어도 대충 이게 어떤 통증인지는 알았다. 수많은 이들을 관찰하며 살아왔기에 이것을 칭하는 단어도 알고는 있다마는. 딱히 당장 내뱉기는 싫었다. 서화는 숨을 짧게 들이켜고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늑대인간의 허벅지에 찔렀다. 듣기 싫은 큰 괴성이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귓가를 찍어 내렸다.

 

“좀 조용히 해봐! 귀 아프단 말이야.”

 

비아가 날개로 장난치듯 늑대인간의 콧잔등을 두어 번 쳐댔다. 그리곤 일부러 서화에게 집중하지 못 하게 하려는지 늑대인간의 머리 위에서 정신 사납게 빙빙 돌았다. 서화는 그 틈을 타, 늑대인간의 허벅지에 찌른 검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묽은 검붉은 핏방울들이 늑대인간의 갈색 털과 함께 서화의 푸른 비단옷까지 물들였고, 서화는 그것에 개의치않고 허벅지에 찔러넣은 검을 단숨에 빼내었다. 늑대인간의 손은 서화를 향해 뻗어지고, 그를 향해 손톱까지 내세우며 휘저었지만 서화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검붉은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쥔 서화는 늑대인간의 공격을 피하며 급소를 찾아내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심장? 머리? 아니면 복부? 급소가 어딜까 찾아내던 서화의 옆으로 정휘가 끼어들었다. 말을 탄 정휘는 늑대인간의 복부에 자신의 검을 깊게 찔러넣었다. 푹. 살이 갈리고 안의 장기와 혈관이 터지는 소리가 저 소리 하나로 뭉쳐졌다. 정휘는 그 상태로 자신의 말에서 내리며 검에 매달렸고, 몸에 반동을 주며 검을 더 깊게 찔러넣었다.

 

늑대인간은 또다시 괴성을 지르며 서화를 향해있던 손을 거둬 자신의 복부를 찌른 검을 뽑아냈다. 검을 뽑아내자마자 터져 나오는 피에, 늑대인간은 순간적으로 검을 옆으로 내던졌고 검에 거의 매달려있던 정휘는 검과 함께 옆으로 내던져졌다.

 

“윽…….”

 

흙바닥에 온몸이 쓸린 정휘는 인상을 찌푸리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서화와 같은 생각으로 머리, 심장, 복부 중 하나가 급소라 생각하여 먼저 몸을 내던진 거지만……. 이렇게 하면 소모적인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몇 배, 아니 거의 집채만 한 늑대인간을 상대하기엔 이들은 아는 것이 없었다. 늑대인간은 서적에서만 존재하던 요괴 중 하나였기에 무엇이 약점이고 무엇이 급소인지조차. 비아는 늑대인간의 근처에서 빙빙 돌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시선을 앗아가며 머리를 굴렸다. 확실한 건 늑대인간은 인간이 아닌 늑대인간의 모습이 되면 지능이 일반 짐승보다 더 내려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가진 힘은 정휘를 한순간에 내던져버릴 정도의 괴력이었지만 비아의 날갯짓만으로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릴 정도니.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노릴 수도, 한 곳씩만 노리기에도, 아니 어쩌면 두 곳 다 급소가 아닐지 모르지. 보통의 요괴들은 각자의 특성에 따라 급소의 위치가 천차만별이다. 급소를 확실히 찾아서 한 방에 쓰러트려야 한다. 안 그러면 지금 궁 쪽으로 대피시킨 백성들의 소리를 따라 달려 나갈 기세니까. 늑대인간의 급소, 늑대인간에게만 있는, 약점, 약점…….

 

“아!”

 

비아는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비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쉽사리 공격하지 않고 기다리던 서화와 정휘가 동시에 비아를 올려다봤다. 비아는 드디어 뭔가가 떠올랐는지 밝은 제 금안에 늑대인간의 얼굴을 담았다. 정확히는 늑대인간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 제 몸을 찔러대는 서화나 정휘에게 더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비아에게 신경을 쓰던 이유. 지능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레 눈앞의 장애물을 어찌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제 문신이 급소였기에 비아의 날개를 이리저리 피해대며 괴성을 질러댄 것이었다. 비아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늑대인간의 송곳니를 피하며 검을 쥔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문신! 얼굴에 있는 문신이야!”

 

비아의 말에, 비아가 급소를 찾아내길 기다려주던 서화가 먼저 움직였다. 다리에 힘을 줘 반동으로 날아오른 서화가 늑대인간의 어깨에 제 검을 찔러넣었고, 어깨에 가해진 고통과 서화의 순간적인 무게에 늑대인간은 피를 쏟아내며 휘청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몸짓에 늑대인간은 서화를 공격하기는커녕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던 정휘는 늑대인간이 휘청이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 바로 그의 무릎 뒤에 정확히 검을 찔러넣었다. 늑대인간은 두 사람의 공격에 급소를 들킨 걸 알았는지, 한 손으로 제 문신을 가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늑대인간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서화가 그의 문신을 베어버리면 끝이기에, 비아는 승리를 확신하며 먼저 뒤로 빠져있는 정휘의 옆쪽으로 날아갔다. 서화의 짙은 눈동자는 날갯짓을 하며 허공에 떠 있던 비아에서 정휘의 옆에 착지하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비아의 모습까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아까 느껴진 저릿한 통증이 다시 서화의 온몸에 퍼져나갔다. 손끝마저 저릿해지는 통증과 그 감각에, 서화는 무표정에서 살며시 눈썹이 들썩였다. 제 눈썹이 들썩여지는 것마저 생생히 느껴지자, 서화는 신경질적으로 늑대인간의 손 위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리곤 살짝 벌어진 그 틈 사이로 다른 검 하나를 정확히 문신이 있을 자리로 내던졌다.

 

고통에 괴성이나 질러대던 늑대인간 덕에 이나 혀 같은 장애물 하나 없이 서화의 칼은 그의 문신이 있는 볼을 뚫어, 그대로 정휘의 발 앞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팽, 하는 검과 땅의 마찰음과 함께 정휘의 눈썹도 미세하게 들썩여졌다. 늑대인간은 그대로 땅에 얼굴을 박으며 쓰러졌다. 늑대인간이 쓰러지자, 땅은 크게 한번 울렸고 겁 없는 비아가 늑대인간에게 먼저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숨도, 심장도, 그 무엇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와, 우리가 늑대인간 잡았어! ……나도 잡은 걸로 쳐주는 거지? 그렇지?”

 

아무 말도, 하다못해 아무런 표정조차도 짓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서화와 정휘를 본 비아는 애써 아무런 말이나 짜내며 분위기를 풀어냈다.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고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은 숨이 저절로 막혀왔다. 비아는 두 사람의 정적에 눈치를 보며 뺨을 긁적였다. 정휘는 제 발 앞에 꽂힌 서화의 검을 훑어봤다. 이젠 대놓고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밖에서까지 티 내는 서화의 행동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기에, 정휘는 찌푸려진 눈살 그대로 고갤 들어 서화를 바라봤다.

 

딱히 진심으로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 검은 그대로 자신의 신경이 가장 몰두 되어있던 쪽으로 나아가버렸다. 서화는 제 감정 하나 조절 못 하며 행동한 자신이 실망스러우면서도, 이 와중에도 저릿한 그 통증이 신경 쓰였다. 서화는 아무런 표정 없는 제 가면을 쓰고 정휘를 향해 시선을 흘렸다.

 

비아의 분위기를 풀기 위한 어색한 환호 사이로 정휘와 서화의 건조한 시선이 맞닿았다.

 

 

 

***

 

 

 

차가운 밤공기가 드러난 살갗에 맞닿았다. 서화는 내뱉는 숨과 함께 몽글하게 피어오르는 입김을 저 너머로 흘려보냈다. 그리곤 살짝 흘러내린 제 겉옷을 제 목까지 끌어올렸다. 잠시 생각이라도 할 겸 나온 건데. 서화는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금방 차가워진 제 두 손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늑대인간을 물리치고 축제는 궁의 관할로 넘어가 완전히 중단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에 딱히 불평 없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서화와 비아 또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아는 이제껏 있었던 일을 알아서 하나하나 읊어줬다.

 

그 중엔 오늘 하루 있었던 일만이 아닌 며칠 전, 정휘와 비아가 함께 저잣거리에 있던 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묻지 않아도 알아서 다 설명해준 비아 덕에 서화는 그저 고갤 끄덕이며 비아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덕에 생각할 것이 갑자기 많아진 서화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몽글한 입김 사이로 검은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사실 서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비아와 정휘를 마주쳤을 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것도, 아무 말 없는 자신을 보며 왜 비아가 미안하다고 했는지도. 그리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과 자신이 느낀 통증의 이유도.

 

모르쇠 하고 싶었던 서화지만 어찌 그리 쉽게 될까. 서화는 제 가슴 어딘가를 쿡쿡 찔러대는 통증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요새 제 감정과 표정을 가끔 조절하기 힘들어졌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기에, 서화는 비아에 관한 일에만 이리 반응하는 제 자신에게 혼란스러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과도 큰 제 자신을 향한 실망감은 서화의 어깨를 짓눌렀다. 더는 흔들려서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면 안 된다. 서화는 제 저릿한 가슴팍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대며 자신의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는, 제 감정의 단어를 생각하며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춥군.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서화는 추위에 잘게 떨려오는 제 어깨에, 발걸음을 집 방향으로 돌렸다.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더는 풀어지지 말자. 풀어져선 안 돼.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비아의 방 안에 들였다. 자나 안 자나 확인만 하려 했더니 비아의 이불이 그의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서화는 익숙한 듯, 비아의 이불을 어깨까지 쭉 올려주었다. 이불도 덮어주고 엇나간 베개까지 고쳐 써준 손은 그대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서화의 시야에 웬 종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통의 흰 종이가 아닌 적색이 은은하게 물들여진 귀한 종이였다. 비아가 이 종이를 사용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큰 오라버니에게 서신을 보낼 때 주로 쓰는 종이였다. 딱히 자신의 것이 아닌 서신 내용을 훔쳐보는 취미가 없던 서화가 평소처럼 시선을 떼려던 참이었다. 우연히 서화의 눈에 들어온 서신의 내용엔 제 이름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큰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서신이 확실한데 어째 제 이름만 가득한 걸 본 서화는 살며시 편지를 집어, 천천히 훑어보았다.

 

며칠 전에 참 부끄럽게도 정휘와 자신과의 일도 안 묻고 아무 말 없는 서화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다음 날 다시 들판에 올라가 그날 못 따왔던 찻잎을 한껏 따왔다, 오늘 서화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평소라면 요괴든 뭐든 상대할 때면 적당히 치고빠지는 것이 유했던 서화인데 오늘은 검에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약속에 늦어서 화난 게 분명하다, 아니다, 서화가 애초에 이런 일로 화를 낼 사람은 아니다마는 서화도 사람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겠군, 서화가 아끼던 옷이 늑대인간의 피로 더럽혀졌다, 내일은 서화의 옷을 새로 사줘야겠다, 등등.

 

분명 큰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서신은 맞았다. 하지만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화에 대해 가득 찼고 서신 옆에는 웬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서화는 그 주머니를 살짝 풀어봤다. 주머니 안에는 서화가 좋아하는 찻잎이 가득했고, 향이 한순간에 몰려와 서화의 코끝을 간질였다. 서신과 찻잎, 그것들을 동시에 번갈아 보던 서화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짧은 웃음이 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서화는 제 웃음에 당황한 듯 서신과 주머니를 번갈아 보던 눈이 멈췄다. 늘 해오던 형식적인 웃음이나 느긋한 웃음이 아니었다. 제 저릿한 심장을 간질이는 웃음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서신과 주머니를 도로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제 왼손으로 입술을 가렸고, 천천히 제 입술을 아직도 차가운 손바닥에 깊게 묻었다. 당황스러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한다며, 더는 풀어지지 말자고 속으로 되새기며 걸어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거 하나로 한순간에 제 되새김이 무너졌다. 서화의 시선을 서신에서 입 벌리고 자는 비아로, 그리고 그런 비아에서 비아의 머리맡에 놓인 찻잔으로 향했다. 찻잔엔 다 식어버린 찻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찻물엔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대며 표정 하나 숨기지 않은 제 얼굴이 비쳐 보였다.

 

붉어진 귓불과 목덜미, 눈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당황스러움. 그런 제 모습에 서화는 저절로 헛웃음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런 사사로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어떻게 한순간에 이리 사람이 풀어져 버리는가. 서화는 비아의 옆에 앉아, 비아를 제 짙은 분홍빛 눈동자에 담아내며 혼란을 천천히 머금었다. 점점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해준 건 어느새 잠에서 깨버린 비아의 따스한 손이었다. 사람의 기척에 잠시 잠에서 깬 듯한 비아가 눈을 살며시 뜨곤, 제 옆에 앉은 서화를 확인하곤 저절로 손을 뻗어 그의 뺨 위에 얹었다.

 

살짝 열어둔 창 사이로 보름달의 밝은 빛이 흘러들어왔다. 그 빛은 비아를 더불어 서화에게도 스며들었고, 빛을 머금은 서화의 푸른 머리카락과 벚꽃과도 같은 눈동자는 잠에 허우적거리던 비아를 단숨에 들어 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뻗어진 손은 서화의 차가운 뺨을 감쌌다. 천천히 어루만져 주듯 쓰다듬어주던 비아는 제 눈에 담겨진 서화의 모습에 차마 다 깨지 못한,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곱다. 참 고와…….”

 

빛을 머금은 푸른 머리카락이 비아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서화는 제게 곱다며 잠에 취한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리는 비아의 눈을 바라봤다. 달빛을 머금은 황금빛 눈동자가 절 바라봤고, 그 눈에 비친 제 얼굴과 그 목소리에. 서화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부드럽고 은은한 비아의 체취가 제 코끝을 자극했고 맞닿은 숨결이 제 저릿한 심장을 더 쿵쿵 두드렸다. 서화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던 얼굴을 천천히 풀어내며 절 바라보는 까마귀에게도 안 들릴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빛 머금은 벚꽃잎과도 같은 눈에 어여쁜 까마귀를 담아내며.

 

아, 어찌 이 사람 앞에서 안 풀어질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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