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29 1차 / GL / 파편 *** 흔히 에메랄드빛 바다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한 색을 담은 눈동자에 빼곡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세라엘은 느릿한 깜빡임에 맞춰 책 속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읊어나갔다. 날이 참 좋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해는 높게 떠, 따스한 햇볕을 내리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흘끗 쳐다보거나 밖으로 나와 따스한 햇볕을 실컷 내리쬐었다. 간지러운 웃음소리들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라엘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라엘은 쇠로 만들어진 흰 의자에 앉아, 그저 절 지나치는 이들을 뒤로하고 낡은 책의 페이지를 느긋하게 넘겼다. 글자를 새기는 옅은 눈동자에 햇빛이 들어서질 못한다. 길게 늘어진 회갈색 빛의 머리카락만이 눈 부신 햇살을 모조리 삼켜내니. 그런 세라엘을 리엔시에는 짧은 호흡을 내뱉으며 .. 2021. 2. 20. 초밥 / HL / 1차 *** 이 페이지에 있는 세트 다 주세요. 가게에 들어선 지 5분 만에 꺼낸 첫마디였다. A과 B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을 겸 근처 초밥집에 왔다. 마침 B도 A도 배가 몹시 고픈 상태였고 뭔가 근처에서 맛있는 걸 먹고 싶었기에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초밥집에 들린 것이다. 빠르게 메뉴판을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이 페이지 있는 세트 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A을 접시를 나르던 종업원이 당황한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네?” “아, 메뉴 하나하나 읽어드려야 하나요? 죄송해요. 런치 세트 A에서 F까지 다 주시고 기본 모음 세트 A에서 C까지, 덮밥은 소고기와사비 덮밥 하나랑 연어 아보카도 덮밥 하나요. 아, 그리고 우동 기본 사이즈도 하나 주시고…… B아, 너도 우동 먹을래? 아니면 소바 시켜.. 2021. 2. 20. 1차 / BL / 시계 ***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제 머리에 짓눌려 흐트러진다. 해강은 큰 소파 위에 널브러지듯 누워 시선을 정면의 커다란 티비로 고정했다. 불이 꺼진 저택의 유일한 불빛인 커다란 티비에. 해강은 느릿한 손짓으로 소파 아래에 떨어져 있을 리모컨을 향해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여기쯤 있을 텐데. 분명 자신이 이곳에 내동댕이쳐놨을 거라 생각하며 길쭉한 손가락으로 차가운 바닥을 짚는다. 덜컥. 희고 긴 손가락 끝에 단단한 리모컨이 닿았다. 해강은 그대로 리모컨을 집어 올려 버튼을 이리저리 눌렀다. 대충 영화가 계속 상영되는 채널 하나를 골라 키고, 다시 리모컨을 바닥에 둬버린다. 옆으로 눕혀진 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느릿하게 감겼다 떠지는 긴 속눈썹. 이곳에 온 지 며칠 됐더라. 해강은 기억도 안 나는 숫자를 .. 2021. 2. 19. 품 / HL / 1차 *** 그들과 눈이 마주쳤었다. 저와 같은 붉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쓸어넘기며 길을 건너던 자신과는 달리 아늑한 조명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던 그들. 기분이 참 묘하다. 이젠 성도 족보도 다른 이들인데. 흘끗흘끗 찾아가 한없이 여린 정 붙들고 몰래 훔쳐보던 때는 훌쩍 지났는데. 일그러진 미간을 추위와 피로 뻣뻣해진 손으로 풀어낸다. 태현은 여전히 제 손가락 사이에 남은 굳은 피를 손톱으로 떼어냈다. 굳은 피는 제 손톱에 진득하게 묻어나지도 않고 단번에 떼지더니 그대로 차가운 시멘트 위로 떨어졌다. 그는 어딘가 찝찝한 손톱과 손가락 끝들을 손바닥에 문지르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느릿하게 이어나갔다. 그 새끼가 오늘은 해도 뜨고 밤엔 안 춥다고 했었는데. 검은 셔츠 하나와.. 2021. 2. 3. 1차 / 공상세계 #02_할아버지 / 욕설 多 ***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간다. 정면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옆으로. 끝이 보이는 도로 위를 뒤덮은 큰 절벽. 큰 절벽은 하늘만을 겨우 내보이며 높게 치솟아 올라있고, 끊어진 도로 아래는 끝이 안 보이는 넓은 숲이었다. 근처 있는 거라곤 절벽 끝자락에 걸린 낡은 표지판. 예진은 점점 굳어지는 눈썹을 짧게 들썩이며 표지판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려가지, 마세요.” 예진의 중얼거림에 뒤에 있던 민지가 목에 남은 물기를 소매로 닦아내며 예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두 눈동자가 동시에 정면을 향하고 두 발소리가 불규칙한 소리를 내며 앞을 향했다. 끊어진 도로의 끝자락에 선 두 사람을 살짝 고갤 내빼어 도로의 아래를 바라봤다. 웬 작은 건물 두 개가 보인다. 낮은 흰 건물 하나와 붉은 .. 2021. 1. 13. 1차 / 공상세계 #01_목적지 *** 낡은 창틀은 창문을 내리고 올릴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아슬아슬한 속력을 내는 낡은 차는 조금의 경사라도 있는 구간을 들어설 때마다 버벅거렸고 간신히 핸드폰과 연결한 블루투스 라디오에선 낡은 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예진은 조수석에 앉아 차와 연결한 블루투스 플레이 리스트에서 곡들을 선정하다 순간 덜컹거리는 차에 손을 멈췄다. 창문을 한껏 열고 운전하던 이랑은 방지턱 때문에 그런 거라며 어서 노래나 틀라고 예진을 재촉했다. 예진은 이랑이 좋아할 만한 가수의 곡을 틀다가 뒷좌석에 앉아 과자나 주워 먹던 민지에게 한소릴 들었고, 그걸로 둘은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누가 드라이브할 때 그런 발라드를 듣냐, 그럴 바엔 이 곡 어때?” “너 말고 아무도 모르는 곡.” “유.. 2021. 1. 12. 1차 / A_단문타입 / 형상 세상이 뒤틀린다. 다일은 간신히 준 힘을 발목으로 지탱하며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뻗는 걸음마다 발이 뒤틀리고 시야가 잠식한다. 다일은 절 둘러싼 총구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턱을 위로 향해 치켜들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총구의 끝이 그를 따랐다. 그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여전히 뒤틀리는 발과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갔다. 마비된 후각에 들어찬 굳어버린 핏물과 진득하게 눌리는 살점. 다일은 그런 제 살점을 혀끝으로 밀어내며 충혈된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쇳가루 섞인 안개. 그는 쇳가루에 긁힌 제 목구멍이 토해내는 피를 온전히 흘려보내며 가녀린 두 손으로 제 목을 쥐었다. 나의 신을 죽였다. 그토록 경배하던 저만의 신을 이 손으로 죽였다. 다일의 새하얀 .. 2021. 1. 10. 2차 / 매지컬 고삼즈 / 강혁여름(HL) / 호흡_21.01.06 뜨거운 햇볕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여름은 점점 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근처 그늘진 벤치에 풀썩 주저앉았다. 보통 늦여름이라 하면 슬슬 더위가 가실 무렵이지 않나? 무거웠던 공기가 서서히 풀리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그런 여름. 여름은 땀으로 진득해진 팔을 기분 나쁜 듯 몸에서 떨어트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언제 왔었는지 부재중 전화 2통과 문자 하나가 화면에 띄워져 있다. 여름은 더위 먹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화면을 꾹꾹 눌러댔다. -누나, 제가 시간을 잘못 봐서요...^^ 빨리 씻고 나감 ㅇㅋ? 오키같은 소리하고 있네. 미쳤나, 이게. 여름은 공원 중앙 가로등에 걸린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오후 두 시. 원래라면 두 시에 보기로 한 강혁은 제게 정확히 한시 오십 분에 저걸 보냈다... 2021. 1. 8. 1차 / BL / 책임_20.12.25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봐왔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대기업에 취직한 주인공이 그 유명한 후진 자세로 회사 주차장에 주차하는 장면. 그렇다, 연지는 이 장면만을 한동안 바라왔었다. 그리고 그걸 지금 이 순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연지의 입꼬리는 내려오질 못했다. 오른손은 조수석을 잡고 고개는 뒤로 한껏 돌렸다. 그 상태로 아주 익숙한 듯, 과감하게 뒤로 후진하던 연지의 차는 아주 시원하게 그대로 옆 차에 들이박았다. 사실 익숙한 척은 꽤 잘하는 편이다마는 진짜 익숙한 건 아니라 멋 좀 내보려다가 옆 차에 들이박은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들썩이며 앞으로 밀려 나가자, 연지는 당황한 듯 5초 정도 눈만 끔뻑이길 계속했다. 그렇게 뇌 밖으로 나가버렸던 정신이 되돌아오자, 연지는 차에서 나와 자신이 들이박은.. 2021. 1. 8. 1차 / 동양풍 / HL / 까마귀_20.12.23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비아는 제 치맛자락을 땅에서부터 살짝 들어 올린 채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본래라면 이 길을 서화와 함께 느긋하게 올라왔을 텐데. 비아는 서화 생각에 조금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으로 아아 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이 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높아. 중턱에 있는 들판까지 가는 게 이렇게 힘이 든다니. 아 물론 힘들다는 건 대충 내어보는 소리다. 말동무 하나 없이 산을 오르니 비아는 대충 아무런 말을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으며 아아아 거릴 수밖에. 요 며칠 비가 오고 날은 겨울이 다가와 추워졌고, 이래저래 날씨 변화로 인해 밖에 자주 못 나가던 비아는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좋아진 날씨에 서화에게 함께 산 중턱에 있는 들판에 가자고 졸라댔다. 물론 지금 비아 옆에 서화가 없는 .. 2021. 1. 8. 1차 / To. 나의 딸에게. To.나의 딸에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다. 수많은 편지와 글을 써왔지만 네게 보내는 편지는 이 편지가 처음이다. 이 편지를 네가 읽게 되었다면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겠지. 이에 대해 네게 슬퍼하지 말란 말도, 무책임하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겠다. 내게는 네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것이고, 이것이 부끄럽지 않은 하나의 국민으로서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읽을 네겐 아무런 소용없는 행동으로 보이겠지마는 말이야.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네게 해주고픈 것도 참 많다. 차마 이 얇은 편지지 수십 장에 다 적어내지 못할 것들을 말이야.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해보자면, 너를 낳고 수많은 순간을 후회하고 힘들게 살아왔다. 숫자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 열로 따지면 힘.. 2021. 1. 8. 1차 / HL / To. 나의 아가씨에게 To. 나의 아가씨에게 매일 직접 아침마다 널 깨우며 인사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렇게 글로 네게 인사하려니까 뭔가 어색하네. 내가 나름 사람 놀리는 것 하나는 꽤 잘하는 편에다가 워낙 뭐든 잘 할 것만 같게 생겼다마는, 글재주는 영 아니라서 말이야. 네 성에 안 차는 편지라도 이해해줘. 처음에는 일주일 휴가라 해서 좀 적지 않나, 싶었거든? 근데 지금은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이야. 여긴 놀릴 사람도 없고 같이 놀 사람 없고. 그냥 네가 없으니 영 재미가 없어. 너처럼 반응 좋은 사람은 여태껏 못 봤거든. 아직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 사흘이 이렇게 기나 싶은 거 있지. 그러고 보니 이틀 전에 길고양이들 놀아주려고 밖에 나갔었는데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유독 하악 거리더라고. 털은 흰색에 눈은 하늘색.. 2021. 1. 8.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