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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발렌타인데이 (산악)

발렌타인데이 이벤트 / 2인 A팀 + 2인 B팀

by 샤_ 2021. 4. 25.

 

 

 

 

 

 

“……샤샤샥산?”

“와, 산 이름 완전 내 취향이다.”

“벌써 짜증이 나.”

“왜 그래요, 아가... 이제 막 도착했는데 짜증 내면 래워니 속상해.”

“아 진짜 그 컨셉 언제까지 가는데.”

“네가 반응 안 해줄 때까지?”

“이제부터 반응 안 해야지.”

“하지만... 다른 컨셉들도 많이 쟁여뒀는걸...”

“그냥 네 입을 막고 가야겠어. 아가리 빨리 여기 안 대?”

 

래원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잡고 입에 뭐라도 물릴 기세로 쫓아오는 태현을 피해 빠르게 산을 올랐다. 울퉁불퉁한 길을 성큼성큼 오르며 낡은 나무 울타리의 기둥을 한 번씩 잡아준다. 괜히 도망 다니다가 넘어지면 좀 그렇잖아. 그러고 보니 분명 입구의 인원 체크 기기부터 산 초반까지는 길이 아주 예쁘게 포장되어 있더니 막상 중반에 다다르니 길이 엉망이다. 울퉁불퉁한 땅은 물론이고 낙사 방지를 위한 울타리의 일부 끈은 대충 봐도 낡아빠졌다. 뭔가 살짝만 무게를 실으면 끊어질 것만 같은 그런 끈. 그렇기에 래원은 절 뒤쫓아오는 태현을 피해 뛰며 울타리의 기둥이나 한 번씩 잡길 반복했다.

 

역시 놀리기 잘했어. 래원은 더 이상 말하면서 뛰는 것도 힘든지 조용히 숨만 쉬며 산을 오르는 태현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산 타는 건 재미없다고 도망칠 것 같던 태현은 이젠 힘도 다 빠졌는지 그저 몇 걸음 더 앞에서 절 내려다보는 래원이나 노려봤다. 고개만 슬쩍 돌려 태현을 바라보던 래원은 이젠 그가 도망칠 기력도 없는 걸 확인하고 아예 몸을 뒤로 돌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태현에겐 아주 얄미울 미소를 지어주며.

 

“오늘 일기에 써야겠어. 오늘은 태현이랑 산에서 나 잡아봐라를 했다. 이렇게.”

“너 일기 안 쓰잖아.”

“아냐, 나 요즘은 꽤 써. 한... 두 달에 한 번?”

“애쓰네.”

“안 쓰는 태현이보단 나아.”

“양심이 있으면 그걸 쓰는 거라고 우기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것보다 뒤로 걷지나 마. 너 그러다 절벽 아래로 자빠진다.”

“태현아...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너보단 운동신경이 더 좋은데 너 취급하는 건 조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

“아, 이 씨발년이 또 이러네. 너 그 아가리 빨리 대. 뜯어버리게 아주.”

“아가, 아가리가 아니라 입이라고 했잖아요. 자, 따라 해보세요. 입!”

“입 같은 소리 하네. 아가리, 아가리. 빨리 안 대?”

 

한껏 힘 빠진 얼굴로 산이나 오르던 태현의 얼굴엔 어느새 혈색이 돋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래원의 장난으로 혈압이 오른 거겠지만. 허공에 힘없이 쳐져 있던 태현의 손은 래원의 몸을 잡기 위해 앞으로 뻗어졌고 래원은 그런 태현의 손을 피해 제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야, 너 진짜 그러다 자빠진다. 앞으로 걸어라.”

 

태현에겐 제 앞의 래원 정도는 잡을 체력은 당연히 있었다. 애초에 이 정도 운동으로 지칠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힘을 뺀 채 손이나 휘적거렸다. 괜히 자신이 장난이랍시고 달려들었다가 래원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그런 그의 생각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래원은 절 배려해주는 태현의 모습이 꽤 볼만한지 웃음기나 한껏 머금으며 장난을 이어갔다. 물론 그 장난은 딱 지금 여기까지였다.

 

 

짧고 또 약한. 뭔가가 단숨에 끊어진 소리였다. 래원의 손에 닿았던 울타리의 끈의 끝이 보였다. 래원은 오로지 시선을 태현에게 고정하느라 실수로 울타리의 기둥이 아닌 낡은 끈을 짚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낡은 끈이라도 이렇게 단숨에 끊어질 수가 있는 건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끊어놓고 보이지 않게 살짝 묶어둔 것만 같았다. 끈을 짚은 왼쪽 몸부터 시작해서 머리, 어깨, 골반까지. 뭔가를 의식하고 생각하고 떠올릴 틈도 없이 래원의 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아래로 기울었다. 평소라면 하체의 힘이나 순발력으로 옆 울타리 기둥이라도 잡았을 그였다. 이상해. 내 몸이 이상해. 힘이 안 들어가.

 

“유래원!”

 

제 앞에서 위태롭게 뒤로 걷던 이가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리곤 짧은 끊김과 함께 정면에 고정했던 시야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태현의 몸이 반사적으로 오른쪽으로 틀어졌고 아무런 저항 없이 저 아래로 떨어지려는 래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돼, 안돼, 안돼. 그는 아무런 상황 파악도 안됐다. 그저 본능적으로 래원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안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평온하던 미간이 단숨에 찌푸려지고 눈썹이 크게 휘었다. 아래로 향한 손목과 손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지고 상황 파악조차 못한 몸은 추락하는 이를 향해 내던져졌다. 추락하는 이의 손목을 잡았다. 제 손보다 한없이 얇고 하얀 그 손목을 겨우 잡았고 어깨의 힘으로 래원의 상체를 끌어당겨 제품에 딱 들어맞는 그 몸을 끌어안았다. 잡았다. 잡았어. 그런데, 왜 힘이 안 들어가지?

 

 

 

무언가가 으스러지고 끊기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누군가의 몸에 가려졌다. 더는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

 

 

 

***

 

 

 

- 2명입니다.

 

요즘 산 입구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레이크는 자신의 3배만 한 인원 체크기를 흘끗 훑어봤다. 직사각형 모양의 오래된 듯 군데군데 낡아 녹슨 자국이 선명하며 모양새는 공항에 있는 금속 탐지문과 비슷하게 생겼다. 요즘엔 험한 산이나 높은 산의 경우 이런 기기가 설치된다는 말은 어쩌다 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이건 최근에 설치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대충 좋게 봐줘도 10년은 흘렀을 것 같은 세월 풍파 제대로 맞은 낡은 기계였다. 짙은 남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간다.

 

다른 산에 비해 훨씬 더 높게 선 나무들이 하늘을 빽빽하게 채웠고 울퉁불퉁한 오르막길 옆엔 낡은 나무 울타리가 까마득한 위까지 이어져 있었다. 인원 체크기 뒤 나무들은 중간이 크게 파여있었고 그 안엔 낡은 방울이나 새하얀 천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좋았다.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던 눈동자는 조금 뻣뻣하게 제게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제 어깨에서 정확히 3뼘 정도 떨어진 오른쪽 자리. 레이크는 그 자리에서 시선을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 제 걸음 속도에 맞춰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편하게 걸어도 돼요.”

“……편하게 걷고 있어. 신경 쓰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내리깔아져 있던 눈동자가 눈꺼풀과 동시에 위로 들렸다. 어설프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눈동자는 점점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아예 시야에서 제 왼쪽에 서서 느긋한 속도로 산을 오르는 이가 안 보이도록 꺾어버리듯이. 결국 제 시야에 남은 건 늘 보는 초록 풀떼기들뿐. 평소와 똑같이 겉 허벅지에 닿은 검지가 불규칙적으로 까딱인다.

 

톡 톡톡, 톡

 

허, 생각보다 더 할 말 없네. 뭔가 거창한 대화를 바란 적은 없다. 당연히 이럴 거 뻔히 알았지만 영 생각과는 감정도 공기도 흐름도 다르다. 자꾸만 뭔가가 절 들볶아내려는 것처럼 어딘가 조급함이 옅게 묻어난다. 핏줄 선 손등이 까딱이는 검지와 함께 조금씩 들썩인다. 물론 괜히 티라도 날까 봐 아예 곧바로 손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어버렸지만. 워낙 그가 모든 행동이 능청스럽게 스무스하게 잘 넘어가는 그런 사람이라 그런 건지, 그 무엇도 눈치채지 못한 레이크는 멍하니 앞을 향해 걷길 반복할 뿐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산을 오를수록 머릿속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던 공기는 점점 살랑이며 떠오르기 시작했고 잊힐만하면 그제야 불어오기나 하던 바람은 아예 선선하게 산 전체에 깔리기 시작했다. 풀냄새가 시원하게 제 코를 뚫어주는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사실 조금은 걱정했었다. 음, 조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시작부터 분위기가 엉망이면 어쩌나,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내가 헨켈을 의식하고 그걸 티 내진 않으려나 등등. 전날 밤 물론 잠은 잘 잤지만 꿈에서까지 산을 탈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신경이 많이 쓰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런 곳에 단둘이 오는 건, 그것도 그가 먼저 제게 제의를 하는 건 처음이니까.

 

레이크는 아주 살짝 고갤 오른쪽으로 돌려 제 옆에서 일정한 간격을 맞추고 걷는 그를 슬쩍 쳐다봤다. 딱히 눈에 띄는 표정 없이 주변 나무와 잎을 느긋하게 둘러보는 눈동자와 정말 불편함은 하나 없다는 듯 평소보다 살짝 더 깔린 눈꺼풀과 그 끝에 달린 짙은 속눈썹. 주머니에 숨겨져 있던 오른손이 나른하게 펴져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훤히 드러난 턱선과 턱 끝이 자연스레 위로 치켜 올라진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편안해 보이는 헨켈의 모습에 레이크는 제 몸 속 깊은 곳에 박혀있던 굳은 힘이 빠져버렸는지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머릿속의 잡생각과 몸이 박혀있던 무의식적인 힘이 바람과 함께 산 아래로 미끄러져 버렸다.

 

“이 산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집 주변엔 이런 높은 산이 없어서 그나마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을 찾아왔을 뿐이야.”

“산을 자주 타시나요?”

“……딱히. 앞이나 제대로 보고 걸어.”

 

절 향해 고갤 돌리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않는 레이크를 향해 헨켈이 말했다. 레이크는 헨켈의 대답과 평소와 같은 간결한 명령식 말투에 가볍게 고갤 끄덕이며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초반엔 그래도 나름 울퉁불퉁해도 계단 같은 느낌이 나는 길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지나가야 하는 길에 풀만 대충 깎아놓은 것처럼 길 상태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레이크가 선 왼쪽은 울타리 너머엔 끝도 안 보이는 절벽밖에 없었다. 헨켈은 벌써 숨소리가 전보단 빨라지기 시작한 레이크를 슬쩍 바라봤다. 헨켈은 산을 자주 타는 편이다. 자주? 아니지, 아주 지겹도록 탄다. 그의 직업은 군인이었고 대부분의 부대 근처엔 산이 존재했다. 제 다리로 넘어가든 흙에 더럽혀진 차 바퀴로 넘어가든, 어찌 됐든 그는 산을 자주 타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레이크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헨켈이 시선이 또다시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면을 향해 거둬졌다.

 

딸랑

 

언젠가 한 번은 들어본 것 같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아주 최근, 그러니까 대충 1시간 전에 들어본 것 같은 소리. 레이크와 헨켈의 고개가 동시에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경사가 높은 길을 오르던 발은 중심만 간단히 잡으며 멈췄고 경사로 인해 살짝 숙여있던 두 상체는 꼿꼿하게 펴졌다. 두 시선의 끝이 비슷한 속도로 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헨켈에게서 고작 3m 정도밖에 안 떨어진 한 나무였다. 나무의 중간은 썩은 것인지 누군가가 고의로 파낸 것인지 중가니 크게 파여 있었고 안에는 누렇게 변색이 된 오래된 천과 새 방울이 있었다.

 

딸랑, 딸랑

 

“아까 저 나무랑 똑같은 걸 아래에서 봤었어요.”

“딱히 신경은 안 쓰고 지나갔었지만 나도 기억은 나는군.”

“그쵸. ……근데 왜 방울 소리가 나는 걸까요.”

“글쎄.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바람이 멈췄는데 말이야.”

 

딸랑, 딸랑딸랑, 딸랑딸랑

 

바람은 멈췄다. 이마에 조금씩 맺히기 시작하던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대로 목을 타고 쇄골 저 너머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이상하지. 그래, 참 이상해. 바람은 멈춰서 살에 맺힌 땀은 마르기는커녕 흘러내리는데 귓가엔 방울 소리만 들리잖아. 그렇게 산뜻하고 가볍다 느껴지던 공기는 단숨에 뼈를 짓누르는 것만 같이 무거워지고 꽤 낡기는 했어도 흔들거리지도 않던 울타리가 저절로 쓰러졌잖아. 옆에서 조금 벅찬 호흡을 토해내던 사람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분명 중심을 잡았던 하체에 힘이 갑자기 풀리는데, 이게 어떻게 안 이상하겠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게 당연한 거겠지.

 

저 아래로 추락하는 레이크의 손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틀어박혀 있던 손이 닿았다. 이상하게도 온몸에 힘이 빠졌는데도 그를 잡은 손만은 여전했기에, 헨켈은 이를 꽉 물고 있는 힘껏 제 품으로 레이크를 끌어당겼다. 이를 꽉 문 그의 턱에서 무언가 뒤틀리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

 

 

 

물소리. 뭔가가 느릿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소리가 난다. 태현의 눈은 그 잔잔한 흐름에 맞춰 떠졌고 그 작은 움직임에 맞춰 손가락 끝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위해 들썩이기 시작했다. 뻐근하다. 온몸의 근육과 뼈가 오래된 고철에 기름을 부어주지 않아 녹이 슬어버린 것처럼 뻑뻑하다. 한참을 나뭇잎에 가려져 간신히 보이는 하늘 조각들만을 바라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힘이 완전히 빠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일어날 힘은 있지만 여기서 몸을 더 크게 움직이면 어딘가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는 뼈들이 빠질 것만 같은 감각이 생생했다. 괜히 움직이면 발목이든 허리든 뭐든 뼈가 나갈 것만 같다. 태현은 멍한 정신에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한 손으로 천천히 짚었다.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피는 흙과 섞여 손가락 끝으로 비비면 금방 굳어졌다. 뭔갈, 그것도 아주 큰 걸 잊어버린 듯한 기분에 태현은 천천히 제 붉은 눈동자를 양옆으로 굴렸다. 온통 흙과 풀, 나무뿐이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찝찝한 감각이 가시지 않자 태현의 고개는 힘겹게 뒤로 돌아갔다. 시선은 고개와 함께 뒤로 향했고 흙과 섞인 피는 진득하게 뺨을 타고 턱선에 닿았다.

 

“……래원.”

 

힘없이 퍼져있던 몸에 소름이 돋았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머리카락이 이상했다. 흰색이어야만 하는 머리카락이 붉은색으로 뒤덮여있지 않은가. 소름이 돋은 게 맞는 걸까? 그럼 제 몸을 뒤덮는 이 기시감과 뻣뻣함은 뭐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유래원…… 누나, 기다려. 누나, 정신 차려봐, 응? 래원아.”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과거의 끝자락에 태현의 몸이 엎어지듯 래원을 향해 뻗어졌다. 래원의 얼굴을 다 덮을 것만 같은 큰 손이 다급하게 래원의 몸을 훑었고 붉게 물든 래원의 머리카락과도 같은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려오고 그 감각엔 토악감이 가득했으며 이 감정 또한 흙에 섞인 피처럼 진득했다.

 

 

 

***

 

 

 

기억이 없어. 내가 어쩌다 이곳에 있는 거지? 내가 왜 이 사람 위에 올라탄 채로 누워있고 이 사람은 왜 날 이토록 세게 끌어안은 거지?

 

온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다. 맞닿은 가슴은 터질 듯이 울렸고 머리부터 시작해서 척추를 지나 제 골반까지. 마치 뼈를 망치로 두어 번 두드린 것처럼 뻐근했다. 쿵쿵쿵. 심장이 엇박자로 빠르게 뛴다. 머릿속으로 그 숫자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기에, 레이크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이 정도로 빨리 뛴다면 당장이라도 쇼크사라도 하는 게 정상이라 느껴졌는지 내뱉는 숨을 꽤 느릿했다. 의식된 호흡을 반복할수록 레이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상하다. 이럴 리 없는데, 정말, 이건 아닐 텐데.

 

“레이크.”

 

제 머리 위에서 낮게 울리는 이름에 레이크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흙으로 가득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채 절 내리깐 그 눈으로 바라보는 헨켈이 어색하다. 절 향해 내리깐 저 눈이 익숙하다 못해 평소와 너무나도 같기에, 레이크는 오히려 그것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어딘가 평소의 헨켈과 달랐다. 내 착각인 건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비이상적인 이 심장 박동의 주인이 내가 아닌 그라서 그런 건가. 그래서 이것마저 내가 과의식해버린 부분 중 하나인 건가. 온갖 생각들로 들어찬 머릿속이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했다. 누군가 제 뒤통수를 쇠파이프로 후려친 것만 같은 감각에 레이크는 잠시 두 눈을 감고 느릿한 호흡을 이어갔다.

 

한참을 호흡하는 데에만 집중한 레이크는 그제야 다시 눈을 뜨며 제 이름을 부른 이에게 뒤늦은 대답을 전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심호흡 좀 했습니다. 헨켈은 괜찮나요?”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제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끌어안은 팔이 어느샌가 땅바닥에 놓여있었다. 레이크는 제 물음에 대한 긍정의 끄덕임을 확인하고서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곤 곧바로 어색한 듯 고갤 살짝 옆으로 돌린 채 헨켈의 위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꽤 오래 누워있었는지 몸은 중심을 잡지 못했고 간신히 땅을 짚은 무릎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괜찮나?”

“아... 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죠?”

“아무래도 아까 그 절벽의 아래겠지.”

“그렇겠죠. 둘 다 딱히 크게 다치진 않은 건 다행이지만... 기분이 영 이상하네요.”

“하긴. 그렇게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살아있는 건 물론이고 사지 하나 안 다친 게 이상하지.”

 

헨켈의 말대로 모든 게 이상했다. 이론상의 문제는 둘째치고 애초에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가벼운 타박상만 얻는다? 말이 되지 않는다. 최소 이 정도 높이면 사망이다. 죽지 않은 게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 모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 모든 문제와 직감을 꾹 누르고 태연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온 바닥이 흙과 풀로 가득했고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은 살면서 봐온 나무 중 가장 높았다. 그 높은 나무들은 하늘을 뒤덮었고 그 사이에서 조각난 하늘과 해로 겨우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주머니 속에 고이 넣어뒀던 레이크의 핸드폰은 켜지지도 않았고 헨켈의 핸드폰은 추락하면서 어디론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충 오후 3시쯤이겠어.

 

옷은 물론 머리카락, 얼굴, 옷 속까지 들어온 흙을 털어내던 레이크가 여전히 뻣뻣한 허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가벼운 타박상만 있고 딱히 큰 외상은 안 보이지만 내상은 모르겠네. 아까부터 머리가 웅웅거리던 레이크의 미간은 옅게 찌푸려져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산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헨켈 덕에 최소한의 충격만 받은 자신마저도 머리가 이토록 울린다면 헨켈의 상태는 더 엉망일 테니. 레이크의 눈동자가 평소와 같은 표정, 손짓,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헨켈을 바라봤다. 평소와 무섭도록 똑같은 헨켈을 보며 레이크는 확신했다. 적어도 뼈 하나 정도는 골절된 상태일 거라고.

 

“……세요.”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분명 사람 목소리였어요. 사람이 있나 봐요.”

“……려주세요.”

 

탁탁탁

 

가쁜 숨소리, 점점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어떠한 말을 반복적으로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 두 사람의 고개는 점점 다가오는 소리를 향해 동시에 틀어졌다. 그리고 저 너머 끝자락에서 보이는 형체에 두 사람을 짧게 숨을 들이켰고, 그 형체의 완전한 모습이 보이자 레이크는 그 형체를 향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숨에 달려갔다. 얼굴의 반이 피로 적셔진 남성과 그 남성의 품에 안겨져 머리가 아예 피로 뒤덮인 여성을 향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그 말이 이제야 정확히 귀에 내리 찍혔다.

 

살려주세요.

 

 

 

***

 

 

 

“내가 미안해. 다시는 너랑 밥 먹으면 밥값 많이 나온다고 짜증 안 낼게. 싸가지 없게 이름 부르지 않고 누나라고 꼬박꼬박 부를게... 아가리라고 안 하고 입이라고 예쁘게 말할게. 내가 다 미안해, 누나, 미안해, 제발 눈 좀 떠봐...”

“어, 아까 눈 뜨신 것 같은데.”

“아아... 눈이 안 떠지네... 시력을 잃은 걸까나...?”

“아뇨, 눈에는 이상 없으세요.”

“내가, 내 눈이라도 줄게. 지금 바로 뺄까? 의사 선생님, 이식수술 여기서 할 순 없나요? 제발요.“

“잠시 일시적으로 안 보이실 수는 있긴 한데 상태는 괜찮으세요. 눈 너무 깨끗하시던데.”

“아니, 그러면 왜 우리 누나 눈이 안 보여요. 우리 애가 눈이 안 떠진다잖아요!”

“아이고오... 태현이가 안 보이네...”

“누나, 나 여깄어. 이거 내 손 맞지? 응? 우리 의사 선생님께서 어서 이식수술 해주실 거야.”

“여기서요? 제가 그쪽 전문의는 아닌데... 아니, 일단 진정해보세요.”

“허..억...! 초, 초밥...”

“초밥? 초밥? 그래, 내가 당장 근처 강가라도 가서 회라도 떠올게. 기다려, 알았지?”

“아니, 진짜 가려고 하시네. 상태는 그쪽도 안 좋으세요. 갑자기 일어나시면 안 돼요! 아악.”

“개판이네.”

 

진짜 말 그대로 개판, 그 자체였다. 헨켈은 흰색 천 위에 누워 흘끗흘끗 몰래 태현을 바라보는 래원과 그런 래원의 상태도 모른 채 울먹이며 밖으로 나가려는 태현. 그리고 그런 태현의 어깨를 잡고 안간힘을 쓰며 뜯어말리는 레이크를 낡아빠진 소파 위에 앉아 바라봤다. 이대로면 당장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어깨와 턱, 머리보다 고막이 먼저 터질 것만 같았기에, 헨켈은 겨우 소파에서 뻐근한 몸을 일으켜 두 손을 크게 벌려 손뼉을 쳤다. 정확히 세 번.

 

짝, 짝, 짝

 

그 세 번만으로 모든 시선은 헨켈에게 돌아갔다.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겨우 조용해진 이 공간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헨켈은 절 향한 시선과 이 순간의 정적이 사라지기 전에 할 수 있는 말 한마디를 꺼냈다. 바닥에 누워있는 래원을 향해 제 눈을 내리깔며, 그 특유의 안정적이며 나른한 톤으로.

 

“장난은 여기까지 할까요?”

 

헨켈의 시선은 모두를 향했지만 말은 한 사람만을 향했다. 래원은 그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눈치가 좋다느니 그런 건 아니고 애초에 이 상황에서 장난치고 있던 사람은 본인뿐일 테니까. 괜히 어색해진 공기 사이로 붕대나 칭칭 감은 머리가 상체와 함께 일으켜졌다. 한참을 제대로 뜨지 못하던 눈꺼풀이 위로 단숨에 올라가고 그 속에 가려졌던 눈동자는 마치 눈앞에서 기적을 본 사람처럼 감격스러운 눈빛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어, 눈이 떠졌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운이 좋아야 해. 분명 조금 전까진 눈이 안 떠졌는데 갑자기 떠진다? 이건 의사 선생님의 기적이 분며…… 흐악!”

“그 눈깔 빨리 대. 진짜 실명 시켜줄 테니까.”

“아니, 야, 들어봐. 다들 조난 해서 분위기가 어? 다운됐길래 내가 좀 장난을 쳐줘야 이 분위기가, 어어, 그거 내려놔. 허, 흐악, 힉, 어어, 미안, 내가 미안해!”

“저기요, 진정해보세요. 그거, 아니 뭔, 드라이버는 또 어디서 나신 거야. 헨켈! 좀 말려봐요!”

 

음, 괜히 한 걸까? 헨켈은 아까보다 더 시끄러워진 상황에 자연스레 입꼬릴 말아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엉덩이는 도로 낡은 소파 위로 돌아왔고 눈꺼풀은 조용히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고막은 이미 터진 것 같다.

 

 

 

***

 

 

 

지어진 지 꽤 오래된 듯한 낡은 오두막 안의 것들은 모두 낡아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명상 중인 헨켈이 앉아 있는 탁한 붉은 색의 소파도, 겨우 진정이 된 건지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 태현이 연 삐걱거리는 수납장도, 래원의 상처에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레이크의 옆에 놓인 구급상자도, 얌전히 레이크의 치료를 받는 래원이 앉은 탁한 초록색 천이 덮인 흔들의자도. 어느 것 하나 낡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이곳이 조난 오두막이라는 점이다. 수납장에 마실 거라도 있나 열어보던 태현은 꽤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짧은 탄성을 내뱉어버렸다.

 

“이야....”

 

생수부터 온갖 통조림과 와인, 부탄가스까지. 조난 오두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낡은 수납장 안에는 음식들과 간단한 생필품들이 가득했다. 굳이 문제를 찾아보자면.

 

- 2011년 6월 14일까지

 

“에이, 씨발.”

“쟤 또 욕하네. 뭐라도 찾았어?”

“어. 통조림이랑 와인, 휴지, 수건도 있네. 아, 스프 팩이랑 버너도 있어.”

“와, 그래도 조난 오두막이 맞긴 하나 봐요. 뭐가 많긴 하네요.”

“그러게요. 근데 넌 왜 욕해.”

“유통기한이 2011년이야.”

“아, 저런.”

 

결국 얻은 건 시간이 흘러도 썩지는 않는 생필품들과 생수, 와인뿐이었다. 태현은 품에 생수 6병을 들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와 헨켈 맞은편의 소파에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지나버린 유통기한만큼이나 먼지가 쌓였는지 그가 소파에 앉으니 사방에 먼지가 흩날렸다. 폐랑 목이 먼저 헐어버리겠네. 헨켈은 자신의 코끝을 간질이는 먼지에 겨우 눈을 떴고 힘겨웠던 래원의 치료가 끝난 레이크는 이제야 헨켈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네 사람은 말없이 먼지 가득한 오두막 안에서 숨을 들이켰다 내쉬길 반복했다. 이번엔 숫자조차 셀 수 없을 정도로 꽤 오랫동안.

 

방금까지 그렇게 소란스럽게 떠들었어도 이들 중 몸이 온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가장 큰 외상을 입은 래원에게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태현은 온몸에 긁히고 갈린 자국이 선명했고 레이크는 아까부터 뻐근하던 허리는 점점 올라타 목과 골반까지 어딘가 엇나가는 듯한 감각이 생생해지기 시작했다. 헨켈은 한쪽 어깨가 이미 탈골이라도 된 건지 아님 곧 그렇게 되려는 건지 점점 고통이 심해졌다. 생각보다 긴 침묵 속에서 들려온 건 자신의 손목에 스프레이형 파스를 뿌리던 레이크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저희 자기소개도 안 했네요.”

“아, 그러네요. 지금 당장 뭐 할 것도 없으니 자기소개나 해볼까요?”

 

래원의 대답에 레이크는 가볍게 고갤 끄덕이며 구급상자 안에 파스를 도로 넣었다.

 

“제 이름은 레이크 사이엘이고 나이는 서른입니다. 직업은 아까 말했듯 의사입니다.”

“와아. 제 이름은 유래원이고 나이는 서른넷이에요. 직업은, 간단하게 사업 하나 하고 있습니다. 다음.”

“아, 다음 나야? 이름은 정태현입니다. 나이는 스물여덟이고 직업은 저도 간단하게 사업 하나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두 분이 같은 사업하시는 건가요?”

“네, 그런 셈이죠.”

“와, 어떤 사업 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아... 사업이요? 음, 되게 간단한 사업이에요. 고객님들의 소중하신 분들을 온 힘을 다해 찾아드리고 고객님들 건강 체크도 서비스로 해드리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찾아 앞으로의 여정을 설계해드리고 도와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생소한 부류다 보니 다들 신기해하시더라고요.”

 

거짓말이다. 저런 사업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있다 해도 무엇보다 누가 그런 사업을 하는데 온몸에 흉터가 있어. 레이크는 아까 전, 래원과 태현의 몸을 치료해주며 본 그들의 흉터와 문신들을 떠올렸다. 문신은 아무 의미 없다 쳐도 문신에 의도적으로 가린 듯한 흉터들은 싹 다 칼에 찔리고 꿰맨 자국들로 가득했다. 레이크가 그저 의심과 편견이 많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 누구든 저 몸을 실제로 보면 저 말이 결코 진실일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헨켈도 직접 말한 래원도 옆에서 들으면서 불안하게 생수나 원샷 때리던 태현도 알 수 있었다. 또다시 찾아온 어색한 침묵에 래원은 자연스레 고갤 헨켈에게 돌렸다. 가볍게 손끝으로 헨켈을 툭툭 가리키며 이제 당신 차례라며 알려줬다. 래원의 시선에 그저 이 상황을 지켜만 보던 헨켈이 고갤 살랑살랑 끄덕이며 상체를 앞으로 천천히 숙였다. 제 허벅지 위엔 팔꿈치를 올리고 입가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이다.

 

“이름은 헨켈 스티브, 나이는 서른 셋. 직업은 군인입니다.”

 

헨켈의 미소와 시선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미소와 시선에도 태현과 래원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나이와 이름까지 들었을 땐 새 생수 뚜껑을 천천히 따던 태현은 그의 직업을 듣자마자 손에 들려있던 생수를 또다시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래원은 그를 따라 나긋한 미소를 지은 채 편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맡겼지만 속은 편하기는커녕 영 텁텁하기만 했다. 군인. 그래, 군인이라 다행인거지. 경찰보단 낫잖아. 나은 건가? 뭐든 처리하긴 힘들겠는데.

 

“와아. 그럼 두 분은 혼혈이신가요?”

“아, 네.”

 

래원의 물음에 레이크는 가볍게 고갤 끄덕이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맡겼다. 각각 다른 의미를 품은 시선들이 허공에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고 네 사람은 또다시 밀려오는 정적에, 그저 조용히 낡은 벽시계의 시계초 소리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

 

 

 

“슬슬 해가 떨어지네.”

 

한 손엔 와인 한 병과 다른 한 손엔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던 태현이 말했다. 태현의 말에 샌드위치나 크래커를 하나씩 집어 먹던 세 명의 시선 또한 저절로 창밖으로 향했다. 먼지 가득한 낡은 오두막의 환기를 위해 활짝 열어둔 창문들 사이로 주황빛 노을이 흘러들어왔다. 공기는 어느새 나른하게 번졌고 불 하나 안 킨 오두막은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온 노을에 물들여졌다. 벌써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걸 보니 오늘 밤엔 꽤 추울 것 같네. 헨켈은 제 손에 들려있던 크래커 반쪽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각자 가져왔던 식량은 래원이 싸 온 샌드위치와 레이크가 가져온 크래커뿐이었다. 식량이 이것밖에 없다면 당연히 아끼고 아껴야만 하다. 물론 그건 적어도 부상자가 인원의 반 정도만 됐을 때의 얘기다. 전원이 당장 크게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다쳤고 여기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는 이미 모조리 소모된 상태였다.

 

래원과 태현을 처음 만났을 때, 가지고 있던 거라곤 레이크의 작은 응급 의료 키트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큰 외상이 있던 래원은 자리에 눕히고 나머지가 주변을 둘러보든 뭘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모두가 그걸 원치 않았다. 이곳에 누군가를 눕히고 자리를 떠나버리면 다시는 이곳을 못 찾게 될 것만 같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런 감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생사나 위급한 상황에서 제 머리를 단숨에 관통시켜버리는 그런 강렬한 직감. 그 직감은 모든 이의 머리를 관통시켜버렸고 결국 네 사람은 20분이면 둘러볼 수 있는 거리를 1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동했다. 래원을 제외한 세 사람 또한 아무리 괜찮은 척을 하려고 해봐도 몸이 따라주질 못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찾은 것이 언제 지어진 지도 모를 아주 낡은 이 조난 오두막이었다. 저 몇 조각 안되는 샌드위치와 크래커를 성인 네 명이 아껴먹기엔 무리였다. 결국 있는 식량을 다 먹어버린 네 사람은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을 큰 창문 너머로 바라봤다. 그 누구도 입 밖으로 한숨이나 싫은 소리 하나 내진 않았지만 다들 표정이 떠들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대로 시간만 축내긴 좀 그렇지 않은가. 곧 있음 해가 떨어지고 추위가 어느 순간부터 몰려올 테니까. 헨켈은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엄지에 가볍게 털어내며 손가락 끝에 묻었던 크래커 가루를 떨궜다. 헨켈의 움직임을 한참 전부터 대놓고 지켜보던 래원은 그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숨에 알아차렸는지 종이컵에 남겨진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행동을 취한 건 헨켈이지만 먼저 말을 꺼낸 건 래원이었다. 헨켈도, 래원도 그걸 각자 원했는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불이라도 피울 나뭇가지라도 구해오죠. 마침 저기 수납장에 양초랑 성냥도 있으니까 다들 하나씩 들고 이동할까요?”

“그러죠. 근데 저희는 슬슬 움직여도 괜찮지만 래원씨는 괜찮으신가요?”

“이제 어지러운 것도 가셨고 걸음은 느려도 움직일 순 있어요. 무엇보다 쉬기만 하기엔 오히려 몸이 더 불편하고요.”

“편히 쉬고 계시는 걸 추천해 드리지만 잠시라도 움직이고 싶으시다면 너무 무리만 하지 마세요.”

“무리할 것 같으면 태현이가 알아서 들처업어줄거라서 괜찮아요.”

“내가 왜.”

 

절 걱정하는 듯한 눈빛에 래원은 괜찮다며 오히려 레이크를 안심시켰다. 래원의 말에 이미 수납장에서 촛불과 성냥을 꺼내오던 태현은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랑 표정은 저래도 제일 일은 잘해. 래원은 태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성냥과 촛불을 하나씩 나눠놓곤 자신의 몫은 주머니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곤 슬슬 가보자는 듯한 태현의 고갯짓에 태현과 함께 먼저 오두막 문을 나섰다.

 

 

 

***

 

 

 

“알아챘네.”

“하긴, 네 몸을 보고 못 알아차리는 게 바보지.”

“내 몸이 뭐 어때서. 애초에 연기를 할 거면 차라리 겁먹은 척하지 그랬어.”

“그런 연기는 영 몸에 안 맞아. 그리고 헨켈이었나? 그 군인은 이미 우리 보자마자 경계했었을 거야. 딱 봐도 머리 하나 잘 굴리는 인간 같아 보이잖아. 그래, 특히 그 미소.”

“미소? 그게 왜.”

“차라리 그 의사 양반처럼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웃음이면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그 군인 웃음은 영 쎄해.”

“그래서 죽이자고? 죽일 거면 군인만 죽이지 그래.”

“왜? 의사한테 정들었어?”

“정들긴. 너 걱정하는 건 진심인 것 같던데. 착하잖아.”

“군인 돌려 까네, 안 착해 보인다고. 뭐, 애초에 우린 쟤네 둘 죽이면 안 돼.”

 

태현은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기적어기적 부축받는 자세로 걷는 래원을 바라봤다. 눈빛엔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생각이 가득했다. 그 눈빛에 래원은 고갤 살짝 뒤로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쯤이면 꽤 떨어졌겠지. 래원은 태현의 어깨에 두른 자신의 팔을 빼내고 그의 키에 팔 높이를 맞추느라 애쓴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답했다.

 

“군인에 의사야.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혼혈. 일반인 하나 처리하는 것도 뒤처리가 얼마나 귀찮은데 저 정도 스펙이면 지금 이 상황에선 꽤 무리 가는 조건이잖아.”

“무리야 가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태현은 자연스레 챙겨온 자신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딱히 든 건 없어 보였는데 내려놓는 소리는 꽤 묵직했다. 가방의 지퍼를 열어 바닥에 힘없이 엎어버리니 가방 안에 내용물들은 우르르 쏟아졌다. 작은 스나이퍼 칼부터 괜히 가방 천 찢어질까 봐 고이 칼집에 모셔둔 큰 칼, 공구용 드라이버랑 망치, 청색 테이프까지. 난 분명 별 뜻 없이 산이나 타자고 했던 건데 얜 대체 뭘 챙겨온 거지. 태현은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의 뜻을 래원에게 설명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드라이버 하나를 래원 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군인, 그 헨켈이라는 사람. 식량 찾아보자고 각자 가방 열어볼 때 구석에 있던 스나이퍼용 칼 봤어. 그것만 있진 않겠지. 애초에 그것만 있다 해도 지금 우리 몸 상태로는 조금은 애먹을 거야.”

 

태현의 드라이버 끝이 래원의 머리와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식량과 물, 육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줄 와인. 그것들을 모두 먹었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에너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 래원은 태현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절 가리키는 드라이버의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괜찮아. 군인은 우릴 못 찔러.”

“의사까지 우릴 경계하는 상황인데?”

“그래, 그 의사. 레이크란 사람. 두 사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냐. 친한 사이? 나야 확실한 관계는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군인이 의사를 의식해. 음, 부정적은 아니고. 아주 긍정적으로.”

“의사를 인질로 잡자는 소리야?”

“맞아, 의사를 잡아버리면 군인은 우리한테 못 달려들 거야. 잘하잖아, 우리. 인질극.”

 

태현의 손에 들려있던 드라이버가 완전히 래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태현의 래원의 말에 의미 모를 헛웃음과 함께 고갤 끄덕였다. 그는 당연히 래원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지. 태현은 헨켈을 의도적으로 계속 지켜보지 않았으니까. 래원은 헨켈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던 그 순간부터 끝까지 그만을 지켜보았다. 생판 남인 자신과 태현에게 하는 손짓과 말보다 더 레이크에게 신경 쓰는 모습은 래원처럼 끈질기게 그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겉으론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래원은 그런 그를 대놓고 쳐다봤었다. 그가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먹을 메시지를 넘겨주기 위해.

 

 

 

***

 

 

 

같잖네. 헨켈은 슬슬 어두워지니 성냥을 이용해 양초에 불을 붙이려는 레이크를 슬쩍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 안에 자리한 스나이퍼용 칼 하나를 천천히 매만졌다. 절 향한 집요한 눈빛이 전하는 말이 제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충 제 형식대로 정리해보자면 이런 말이겠지. 행동 제대로 안 하면 의사를 죽여버리겠다는 말. 태현의 가방에서 갑자기 나오던 드라이버와 그 속에 있던 다른 칼들. 그런 말들에 겁을 먹을 헨켈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딱히 겁을 먹었다느니 그런 건 아니다. 다만 평소보단 좀 더 신경이 쓰인다는 점. 헨켈은 제 옆에서 한 손엔 양초를, 한 손엔 나뭇가지 두세 개를 쥐고 주변을 둘러보는 레이크에게 말했다.

 

“레이크, 저 사람들 조심해. 아까 보니 드라이버랑 칼 가지고 있었어.”

“네, 저도 아까 봤어요. 사업 얘기도... 아마 거짓말이겠죠.”

 

절 향한 걱정인지 아니면 그저 예의상 전해주는 말인지. 어찌 됐든 제게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헨켈을 흘끗 바라보던 레이크는 또다시 한 손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는 헨켈을 보곤 자연스레 고갤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가 오두막을 나서기 전, 저 몰래 주머니 속에 스나이퍼 칼 하나를 넣는 걸 봤다. 절 향한 배려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크는 자신에게 주머니 속 칼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아예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버린 헨켈의 행동에 괜히 입꼬릴 살며시 올려 웃었다.

 

“헨켈, 촛불이 거기까지 안 닿아요. 떨어지지 말고 옆에서 같이 걸어요.”

“……저기 끝에 뭐 보이길래 보고 왔을 뿐이야.”

“네에.”

 

일부러 끝을 늘어트리며 대답하는 레이크의 입가는 점점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느샌가 그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 긴장은 사라졌다. 헨켈은 레이크에게 조심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던 건지, 레이크의 옆에서 무의식적으로 떨어졌다 붙었다 하길 반복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두 사람의 한쪽 품엔 마른 나뭇가지들로 가득했다. 네 사람 모두 숲 깊게는 안 들어갔는지 어쩌다 도중에 마주쳤고 각자의 품에 안긴 나뭇가지를 보곤 이 정도면 됐는지 다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 대충 한 시간 전의 일 같다.

 

“돌겠네. 분명 직진밖에 안 했는데 왜 되돌아가도 오두막이 안 보이지?”

“그러게요... 저희도 혹시나 길 잃을까 봐 아예 직진밖에 안 했는데...”

“그쵸... 모두 직진밖에 안했는…… 네?”

“네?”

“아니, 직진만 하셨었다고요?”

“네. 저희는 직진만 했었어요. 그쵸, 헨켈.”

“네. 오늘 길에 일부러 촛농을 조금씩 흘려놓기도 했었죠. 아.”

 

그 누구도 되돌아가는 이 길에서 헨켈과 레이크가 흘려놓았었다는 촛농 자국을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헨켈과 레이크는 오두막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이동했었고 래원과 태현은 오른쪽으로 이동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네 사람은 정말 본인들의 말대로 직진만 했다면 만날 수 없었다. 물론 그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건 그저 이 상황뿐. 그래, 오두막 오기 전에 그렇게 직감이니 뭐니 하면서 환자들끼리 열심히 걸어 다녔으면서. 이젠 그놈의 직감도 다 글러 먹었네. 태현의 가뜩이나 희미한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쳤다. 이젠 얼마 남지도 않은 인내심은 그들의 발걸음이 어딜 향하는지도 모르는 길을 향해 내딛어질 때마다 사라졌다. 남은 인내심이 이젠 한 줌도 남지 않고 그의 인내심이 폭발하기 직전, 네 사람의 앞에 웬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뭐야, 저거.”

“동굴이네요.”

“근처에 표지판 같은 건 없나요?”

“딱히 없네요. 막 곰 세 마리 나오는 거 아냐?”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동굴 같진 않은데. 입구는 그리 큰 편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갤 숙여 안을 슬쩍 훑어본 태현은 이 동굴은 입구에 비해 안은 꽤 넓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비이상적인 숲에서 오두막을 찾을 확률따윈 이젠 1퍼조차 남지 않은 그들에게 동굴은 유일한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렇다. 여전히 그 1퍼도 남지 않은 확률을 위해 오두막을 찾아 헤매거나 숲에서 장작 하나 피워 잠을 청하거나, 아니면 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 안전한지 또는 이어진 길이 있는지 확인해보기. 뭘 선택하든 오래 살지는 못할 방법인 건 확실했기에, 네 사람은 별말 없이 하나둘 고갤 숙여 동굴 안을 멀찍이서 훑어보기만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들어는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우르르 들어가기보단 줄을 서듯 일렬로 가는 게 좋겠네요. 누가 제일 앞에 설래요?”

“이대로 일렬로 서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티 나지 않게 흘끗흘끗 태현의 가방과 래원의 주머니 속을 지켜보던 헨켈이 태현의 말에 대답했다. 참고로 헨켈이 말한 ‘이대로’는 태현, 래원, 헨켈, 레이크 순이었다. 누가 봐도 헨켈에게 가장 유리한 순서였다. 레이크는 자신의 뒤에 있으며 래원과 태현의 뒤에 서서 뒤에서 칼을 잡든 누구 하날 잡아내든, 가장 안전한 순서.

 

“에이, 그러지 말고 그럼 키순으로 갈까요?”

“그러죠. 그럼 태현씨, 저, 래원씨, 레이크순이네요.”

“아니죠. 헨켈씨, 저, 래원, 레이크씨 순이죠. 헨켈씨가 저보다 좀 더 커 보이네요.”

“아무래도 추락하실 때 눈을 다치신 건 태현씨였나 보군요. 아무리 봐도 태현씨가 저보다 더 커 보이는데요.”

“이 정도면 비슷하지 않나요? 제 눈엔 헨켈씨가 좀 더 커 보이네요.”

“안타깝게도 제 키가 180㎝라서요.”

“저도 아무리 봐도 헨켈씨가 아슬아슬한 180㎝로는 안 보이는…….”

“아, 그냥 둘 다 나와요. 나랑 레이크씨가 앞장 설 테니까. 가죠, 의사쌤.”

“네, 래원씨.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양초 좀 잡아주시겠어요?”

 

두 사람의 말을 레이크와 함께 듣고만 있던 래원은 웃는 낯으로 태현에게 대꾸하는 헨켈과 그런 헨켈에게 자신의 뒷자리를 죽어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태현의 사이를 뜯어냈다. 그 사이에 레이크는 이미 래원에게 양초를 넘기고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래원 또한 그런 레이크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들어가는 입구에 비해 저 너머에서 바라만 보던 것과는 달리 훨씬 더 넓었다. 래원과 레이크를 따라 들어온 두 사람도 자연스레 넓은 동굴 안을 손에 쥔 양초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펴봤다. 사람과 넓은 동굴들을 모두 비추기엔 손에 들린 촛불은 한없이 작았다. 그렇기에 다들 한 손엔 양초를 쥐고 속으론 자신들의 계획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앞을 향했다.

 

“생각보다 동굴이 꽤 기나 봐요. 아직도 끝이 안 보이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두 갈래 길이나 야생동물 같은 것들은 안 나와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긴 동굴이면 자연 동굴보단 인조 동굴인 것 같은데...”

“그러기엔 뭔가 동굴 안엔 표지판이나 사람의 흔적 같은 건 하나도 안 보이네요.”

 

표지판 같은 친절한 배려는 이젠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이 지나갔던 흔적이나 이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조 동굴이기만을 바라던 네 사람은 끝없는 동굴과 습한 공기, 울퉁불퉁한 길로 인한 큰 체력소모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레이크는 제 뒤에 서서 가끔 자신이 휘청일 때마다 어깨를 가볍게 잡아주는 헨켈을 바라봤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점점 느려지는 헨켈의 발걸음에 레이크는 와인 한 잔으로 밀어낸 고통이 다시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죽겠네. 뭐든 좋으니 뭐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덜컹

 

“어, 뭔 소리 안 들리셨어요?”

“뭔가 들리긴 했는데.”

 

덜컹, 카드득, 드르륵

 

“이게 뭔 소리지? 덜컹, 카드득, 다라락? 아닌데.”

“확실한 건 동물 소리는 아니네요. 아무래도 차 소리 같은데요.”

“차 소리 맞는 것 같아요. 소리가 꽤 큰 차 같네요. 역시 이 길이 통로가 맞았…….”

 

 

헨켈과 레이크의 말대로 지금도 들려오는 이 소리는 차 소리가 맞았다. 그러니까, 태현이 낸 이상한 ‘덜컹, 카드득, 다라락‘ 이 소리와 방금 들린 큰 충돌 소리까지. 차가 동굴 벽에 크게 박은 듯한 소리와 함께 동굴 안엔 그 어떤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옅은 숨소리도 침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까지도. 네 사람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에서 눈빛을 교환했다. 길은 두 갈래 길이 아닌 딱 하나밖에 없는 길이기에, 당연히 차는 네 사람의 앞에 있을 것이다. 물론 앞에는 다른 갈래 길이 있을 순 있지만 이 정도 소리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자신들의 위치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이대로 차가 달려온다면 그대로 차에 치일 게 뻔했고 그렇다고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차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엔 뭔가 저 큰 충돌음을 일으킨 차주가 자신들을 구하러 온 산 관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심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제껏 지나온 이 산의 길들을 떠올려보면 그럴 만도 하지.

 

네 사람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빛으로 하는 대화가 점점 어질러지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저 너머에서 차가 속력을 내며 달리는 것인지 울퉁불퉁한 거친 길을 바퀴로 지나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진짜 차에 치이게 생겼기에, 헨켈은 다급하게 제 앞에 있던 레이크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벽면에 달라붙었고 계속 어쩔까 생각하던 래원과 태현은 결국 정면을 향해 소리쳤다.

 

“사람! 사람 있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속력 낮춰! 야, 낮추라고!”

 

태현은 점점 다가오는 차 소리에 결국 가방 안에서 망치를 꺼낸 채, 래원을 끌어안고 헨켈과 레이크가 붙어있는 반대편 벽면에 달라붙었다. 헨켈은 한 손으론 레이크의 어깨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론 태현이 꺼낸 망치를 보고 몰래 주머니 속에 있던 스나이퍼 칼을 꺼냈다. 점점 다가오던 차 소리는 어느샌가 코앞에서 멈췄고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큰 불빛은 네 사람의 시야를 단숨에 덮쳤다. 눈을 뜨고 정면을 보려 해도 시야를 완전히 덮쳐오는 불빛에 네 사람은 겨우 눈을 실눈으로 뜬 채 자신들의 길을 가로선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내 말 맞지. 아니, 사람 있다는 소리가 그렇게 들렸는데 넌 왜 못 들었냐?”

“난 운전하느라 바빠서 그랬지. 아무튼 내가 잘 세웠다는 게 중요한 거지.”

“참나, 라이트나 꺼. 것보다 다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달달 거리는 시동 소리와 언제 꺼지나 했던 불빛이 그제야 꺼졌다. 훤히 보이는 시야에, 태현과 헨켈은 다급히 자신들의 손에 들려있던 것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생각보다 다들 꽤 긴장했는지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는 웬 남자 두 명과 낡은 흰 트럭을 확인하자마자 그제야 꾹 눌러둔 호흡을 편히 내뱉기 시작했다.

 

“혹시 조난 상태였나요?”

“아... 네. 혹시 실레가 되지 않는다면 어쩌다 여기로 오신 건지 여쭤도 될까요?”

“아, 저희는 여기 산 관리자입니다. 원래 오늘은 순찰하는 날은 아닌데 오늘 낮에 워낙 날이 좋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나와봤던 건데 잘 왔네.”

“날이요? 날씨가 왜요? 오늘 낮에 꽤 선선하니 좋았는데.”

“아, 여기로 들어오신 거면 조난 오두막에 며칠 묵으셨었나 보네. 오늘 낮에 밖에 안 나왔었나봐요. 오늘 비바람이 얼마나 심했는데. 그래도 좀 해 지고는 그쳐서 다행이지.”

“수다 그만 떨어. 다들 놀라셨을 텐데 어서 데려가자. 다들 일단 트럭 안에 자리가 없어서 트렁크 위에 우선 올라오세요.”

“그 옆에 고리 같은 거 있을 텐데 그거 열면 올라오기 쉬워요!”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는 그저 멍하니 자신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이들을 향해 친절히 손을 내밀어 트렁크 고리를 여는 법을 알려줬다. 창밖으로 나온 남자의 팔은 불투명한 파란색 우비에 덮여있었다. 네 사람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남자의 말에 따라 트렁크의 고리를 풀고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트렁크 쪽에서 다시 고리를 잠그는 소리가 나자, 남자들은 다시 왔던 길을 후진해서 돌아갔고 꽤 큰 트렁크 위에 조금씩 떨어져서 앉은 네 사람은 마치 중얼거리듯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다들 산 몇 시에 오르기 시작했나요? 저희는 오전 11시쯤이요.”

“저희는 오전 10시쯤이요. 그, 제가 가장 머리를 크게 다쳤던 사람이라 그런데 혹시 낮에 비 왔었나요?”

“아뇨, 비 안 왔습니다. 오히려 화창했죠.”

“저만 본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저희 아까 트럭이랑 벽이 충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었잖아요. 근데 트럭이 좀 낡았긴 해도 어디 박은 자국은 없던데...”

“아, 저도 확인했습니다. 낡아서 녹슬거나 그런 거 말고는 멀쩡하더라고요.”

“……저희, 조용히 앉아서 가기나 할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헨켈.”

 

덜컹, 덜컹

 

성인 네 명을 트렁크에 태운 트럭이 거침없이 후진하더니 드디어 동굴 밖으로 나왔다. 트럭의 바퀴는 축축하게 젖은 흙을 밟고 산에서 내려갔고 그 움직임에 따라 벨트 하나 없는 트렁크에 앉은 네 사람의 몸은 이리저리 밀렸다. 그럼에도 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아 몸이 밀리는 대로 멍하니 있었다. 각자의 소지품 또한 흔들림에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빠져나왔는지 트렁크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망치, 스나이퍼용 칼, 드라이버, 응급 의료 키트. 그 누구도 트럭이 산에서 내려가는 동안 입 한 번 열지 않았고 그건 산 입구의 인원 체크 기기를 지나고서도 여전했다. 아니지,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탄 트럭이 지나친 입구는 레이크와 헨켈이 들어온 입구였기도 하고 이젠 도로 이 산을 빠져나가는 출구가 되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게 뭔 뜻이냐면.

 

- 삑, 입구입니다. 출구는 반대편입니다. 현재 남은 인원, 0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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