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단위로 들려오는 발포음과 총성에 귀는 이명에 뒤덮인 지 오래였다. 흙과 쇳가루로 한쪽 눈의 시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코로 숨을 들이켤 때마다 피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는 피를 뒤집어썼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피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전쟁이 지속된 지 1년이 넘었다. 1년간 우리가 얻은 것은 줄어드는 인력과 죽은 이에게 감정을 덜 쏟아부을 수 있는 이성뿐이었다. 이성이라 부르기도 애매하지만 말이다.
그의 옆자리는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늘 바뀌기 일쑤였다. 처음엔 두고 온 동생의 사진을 품에 넣고 다니던 어린 병사였고, 그다음엔 2살 아이와 남편을 두고 온 병사, 또 그다음엔 이미 가족을 모두 잃어 매일 밤 가족들의 유품을 끌어안고 자던 병사까지. 지금 그의 옆자리는 매일 밤 먹을 것을 모두 게워내야만 잠이 들 수 있는 가장 어린 병사지만. 그는 잠잠해진 틈을 타 큰 바위에 기대 쉬고 있는 병사들 틈에 껴, 잠시 총을 옆에 세워둔 채 바위에 몸을 기댔다. 그는 조용히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다른 병사들도 모두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확히는 열지 못한 게 맞지만.
그러다 그가 기댄 큰 바위 너머로 반대편에 기대 쉬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짧은 탄성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소리라곤 코훌쩍이는 소리나 토악질해대는 소리뿐이었다. 누군가가 전사했다. 그 누구도 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고 작은 울음소리마저 5분도 채 못 지나 삼켜졌다. 누군가의 죽음이 익숙해지고 감정이 무뎌져 가는 건 생각보다 더 위험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악감에 밤을 지새우던 전과는 달리, 그는 이젠 매일 밤 자신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시체들을 뒤로 하고 오로지 내일도 살기 위해 잠을 청했다. 이런 생활을 산 지 1년이 지났다. 그는 피로 떡 져 뻣뻣해진 눈가를 쓸어내렸다. 잠을 자도 피곤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피곤이 가셔버린 채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는 게 더 기분 나쁘겠지만.
그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피로와 뻐근한 몸에 그저 숨만 내쉬며 바위에 몸을 맡겼다. 그는 자신의 가슴 안주머니에 넣어둔 반지를 생각하며 손을 더듬거리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집에 홀로 두고 온 남편이 평생 함께하자며 약지에 끼워준 은색 반지다. 가슴 위로 손을 올린 그는 그대로 고개만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바위나 나무에 기대앉아 숨을 고르고 있거나 얼마 남지 않은 붕대와 소독약으로 바닥에 누워 치료받고 있었다. 분명 1년 전에만 해도 사지 멀쩡하던 이들은 대부분이 팔이나 다리의 일부분을 도려냈고, 흙과 쇳가루로 다들 시력은 낮아졌다. 몇몇 이들은 아예 한쪽 눈의 시력을 모두 잃기도 하지만. 그는 앓는 소리 하나 안 내는 그들 사이에서 그저 반지를 넣어둔 자리에 손을 얹고 모래바람으로 하늘조차 안 보이는 곳에서 하늘이 있을 위를 바라봤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허공만 바라보며 숨만 내쉬길 반복하는 이들도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만 되면 품에 넣어둔 소지품을 꺼내기 바빴다. 반지나 목걸이부터 시작해서 쪽지로 작게 접어둔 편지, 아니면 십자가 같은 것들까지. 품에서 꺼낸 소지품들을 손에 쥐고 남아있을 이들의 생사와 다시 만날 그 순간들을 상상하는 그 시간이, 그들에겐 그나마 휴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고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이들은 하나둘 소지품을 꺼내지 않거나 남겨진 이들에 대한 생각을 지워나갔다. 헛된 희망조차 품기 힘들 정도로 전쟁은 사람을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반 이상이 헛된 희망을 품지 못하니 다른 이들까지 헛된 희망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내게도 적용됐다. 더는 제 품에 들어있을 반지나 그이의 사진을 꺼내지 않았고, 더는 전쟁통 중앙에 덩그러니 남겨져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그이를 떠올리는 것도 포기했다.
흙과 쇳가루로 저하되던 시력은 가끔 앞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됐고 조금만 오래 쉬면 놓아질 것만 같은 정신에 주먹으로 내려쳐진 뺨은 안이든 밖이든 다 터져버렸다. 왼손의 잘려 나간 손가락 2개와 총에 맞아 도려낸 후 전처럼 뛰지 못하는 다리, 하루하루를 피에 적셔져 살아 어느 것이 제 피 냄새인지 남의 피 냄새인지 헷갈리는 후각. 나는 누가 살아있는 이인지 누가 죽은 이인지도 구별하기 힘든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곤 나와 같은 이들을 나라의 명으로 죽이고 그들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생사도 모르는 그이가 준 반지 위로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이들 중 전쟁의 시작을 기억하는 이는 몇 명일까.
여전히 모래바람에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고갤 들어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을 바라봤다. 언젠가는 모래바람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이길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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