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손에서 비린내가 나는 걸까. 나는 내 붉게 물들어진 두 손을 바라봤다. 딱히 당장 드는 생각은 많지 않았다. 그저 좀 더럽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피비린내 나는 제 손이 역겨워 토악질해대며 새하얀 벽지에 제 손을 문질러 댔다. 왜 내 손에 이런 게 묻혀 있는 거지? 나는 하얀 벽지가 붉게 물들어 문지를수록 벽지가 밀려날 때까지 문질러 대고서야 벽지에서 손을 뗐다. 아무리 벽지에 손을 닦아도 손엔 선홍빛의 것이 선명히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손을 계속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더 아래로 두어 제 치마를 보았다. 치마 끝자락에도 아까 제 손에서 봤던 것과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나는 또다시 밀려오는 역겨움에, 이번엔 토악질을 참으며 그 자리에서 제 치마를 벗었다. 치마를 벗으니 이번엔 소매에 묻은 것들이 보여 상의까지 모두 벗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내 몸은 두 곳만을 가린 몸이 되어있었고, 나는 이제야 드는 후련함에 기지개를 피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 이게 뭐야? 나는 화장대에 걸린 큰 거울에 비친 제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붉은 것들과 엉겨 붙어 떡이 져버린 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는 머리카락들 사이로 손가락들을 집어넣어 아래로 당겼다. 딸려가는 머리에 힘을 주며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빗어내다가, 결국 홧김에 화장대 위에 놓인 수선용 가위로 제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한 줌, 두 줌, 세 줌. 어느 정도 내가 만족할 정도로 잘라내니 날개뼈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단 한 가닥도 제 목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만족스러워하며 제 어깨와 무릎, 가슴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손끝으로 쳐내며 바닥으로 떨궜다. 그리곤 화장대에 턱을 괴고 몸을 거울 앞으로 쭉 들이댄 채로 손에 잡히는 아무 립스틱을 쥐었다. 립스틱 뚜껑을 열어, 몇 번 안 쓴 듯한 것을 돌려 위로 올린 후, 그것을 제 입술에 익숙하게 발랐다.
부드럽게 그려지는 립스틱에 정신을 두다 나는 제 입술에 발린 립스틱 색을 그제야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또다시 토악질했다. 이번엔 토악질로 끝나지 않고 쓰라린 위액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화장대 위를 더럽혔다. 나는 제 입술에 발린 새빨간 립스틱을 제 손과 손목으로 마구 지워대다, 그것이 또 제 손목과 손에 묻어버리자 이번엔 거울에 제 손을 비벼댔다. 번진 립스틱은 볼까지 이어졌고 나는 그것이 역겨워 붉게 물든 벽지에 얼굴을 문질렀다. 벽지에 얼굴을 문지르니 저절로 상체가 벽지에 닿았고, 이내 붉은 것이 제 상체까지 물들여져 버렸다. 나는 제 속옷을 벗어버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무서워요. 날 혼자 두지 마요. 다들 어딨어요? 아무나 내게 와줘요.
나는 내가 무슨 말들을 내뱉는지조차 모를 정도의 속도로 중얼거렸다. 뇌 속으론 아무런 생각도, 하다못해 어떤 단어조차도 들어오지 못했고 그대로 흘러가 버리듯 떠밀려갔다. 그러다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피아노 소리에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문 너머에 사람들이 있나 봐. 날 기다리고 있었나 봐. 나는 그대로 제 방의 문을 벌컥 열어 긴 복도를 피아노 소리를 향해 단숨에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해. 원래 바닥이 이렇게 축축하고 울퉁불퉁했었나?
이상하게도 달리는 내내 발끝에는 뭔가가 걸리적거렸고, 나는 그것을 발끝으로 뻥뻥 차대며 뛰었다. 바닥의 일부는 아니었나 보다. 생각보다 가벼웠고 촉감은 차갑고 물컹하고, 좀 축축한 것들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다. 내 눈은 피아노 소리가 나는 곳으로만 고정이 되어, 다른 곳으로 틀어버리려고 해도 안 틀어지니까. 나는 긴 복도를 한참을 달려 끝에 있는 어느 한 큰 문에 도착했다. 소리는 분명 이곳에서 나는 것이 분명했다. 이상하게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은 갑자기 좋아졌고,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벌린 입 크기 마냥 크게 웃어대며 배를 부여잡았다. 한참을 웃어대던 난 천천히 그 큰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분명 들리던 피아노 소리는 안 들렸다. 애초에 방 안엔 피아노가 없었다. 이상해. 분명 여기였어. 여기서 들렸는데. 나는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웃음과 함께 방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 또다시 뭔가가 제 귓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아까 들리다가 만 연주의 뒷부분이었다. 나는 제 귓가를 간질이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에 집중했다.
하지만 소리에 집중하기엔 제 벌어진 입술 사이론 자꾸 웃음을 흘러나왔고, 그것이 제 탐색을 방해했다. 뭔가가 필요해.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필요한 것을 찾았고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붉게 물든 단도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잡아, 날이 제 입술 쪽으로 가게 했고, 그대로 제 입술을 향해 손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하니 예상대로 더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만 한껏 올려 웃으며 제 배까지 흐르는 따듯한 것을 팔로 막 문질러댔다.
제 웃음소리가 멈추자, 다시 연주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에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뭔가 시야가 흐려지고 어딘가가 지끈거렸다. 그 어딘가는 아무래도 머리 쪽인 것 같은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숙였다. 그 상태로 머리를 두 손으로 쥐어 잡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다 소리는 어느 한 문 앞에서 멈췄다. 아, 여기서 나는 소리였구나.
나는 그 문을 활짝 열었다. 열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제 얼굴을 향해 불어오니 저절로 커튼도 제 얼굴에 스치듯 날렸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문 너머로 고갤 내밀었다. 시야는 점점 흐려졌고 그 탓에 몸을 휘청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제 골반을 문틀에 대고 피아노 소리가 들리던 문 너머를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하지만 시야는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져 아무것도 안 보였고, 그 순간 또다시 연주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갤 돌렸고, 내 고개는 그대로 아래를 향했다.
저기구나. 나는 희미한 시야에 의존해 언제부터 문틀 위에 떨어졌는지, 그 위에 덩그러니 놓인 단도를 다시 쥐었다. 제대로 쥔 단도는 신기하게도 마치 내 것인 것 마냥 손에 딱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쥔 채, 문틀에 걸쳐졌던 골반이 그 위로 올라가게끔 몸을 기울였고, 그대로 어깨에 힘을 줘 상체부터 저 너머로 숙였다. 온몸에 힘을 풀고 상체를 숙여버리니 하체는 가볍게 들렸고 그대로 전신이 문틀 너머로 넘어갔다. 바람이 몸을 감싸는 건 1초도 안 된 것 같다. 순간의 반동으로 몸 일부가 들썩였고, 그 후론 딱히 아무런 생각도 감각도 안 들었다.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시야는 이미 제 눈꺼풀이 먹어 치워버렸으니. 이젠 온몸에 감각이 사라졌고, 그러다 점점 희미해지는 귓가로부터 적어도 하나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들었던 것은 연주가 아니라 정말 사람들의 목소리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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