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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간다. 정면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옆으로. 끝이 보이는 도로 위를 뒤덮은 큰 절벽. 큰 절벽은 하늘만을 겨우 내보이며 높게 치솟아 올라있고, 끊어진 도로 아래는 끝이 안 보이는 넓은 숲이었다. 근처 있는 거라곤 절벽 끝자락에 걸린 낡은 표지판. 예진은 점점 굳어지는 눈썹을 짧게 들썩이며 표지판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려가지, 마세요.”
예진의 중얼거림에 뒤에 있던 민지가 목에 남은 물기를 소매로 닦아내며 예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두 눈동자가 동시에 정면을 향하고 두 발소리가 불규칙한 소리를 내며 앞을 향했다. 끊어진 도로의 끝자락에 선 두 사람을 살짝 고갤 내빼어 도로의 아래를 바라봤다. 웬 작은 건물 두 개가 보인다. 낮은 흰 건물 하나와 붉은 건물이 큰 나무들 사이에 있고 그 주위엔 탁한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있다. 여기에 왜 사람이 있는 거지? 민지는 고갤 아래에서 다시 들어 아래의 숲을 천천히 훑어봤다. 나무가 빼곡하게 채워진 숲 사이사이로 보이는 큰 건축물들이 눈에 띈다.
흔히 우리가 알만한 아파트나 빌라 같은 것이 아니라……. 뭐라 설명해야 하지? 민지는 여전히 따가운 목을 소매로 가볍게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한껏 찌푸려진 미간이 더 좁혀지기 전, 민지의 머릿속에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신전. 그래, 신전. 멀리서 보는 거라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여기서 보자면 건축물들은 평범한 모양새가 아닌 책에서만 볼 법한 신전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말없이 굴러가는 두 눈동자가 제 발밑에 멈추고, 거기서 고개를 더 내빼 도로의 안쪽 아래를 바라봤다. 큰 기둥이 이 끊긴 도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흰색으로 페인트칠 되어있는 기둥은 꽤 오래됐는지 페인트 자국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민지를 따라 끊긴 도로 아래를 살펴보던 예진은 아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완전히 아래로 내빼고 기둥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디딜 곳 하나 없는 매끈 기둥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자세히 보니 뭔가 사다리 같은 규칙적인 틈과 작은 구멍이 보인다. 아무래도 여기서 바라보는 거니까 작은 거지 막상 저 기둥까지 가면 작은 구멍은 아닐 거다. 예진은 에서 일어나 차가 멈춰진 곳까지 다시 돌아가는가 하더니, 아예 그 옆 절벽 끝자락에 발을 디딘다. 민지는 그런 예진을 따라가며 뒤에서 계속 예진에게 쉴 틈 없이 질문했다.
“어디가? 언니? 이예진 뭐해? 어, 거기 절벽은 왜. 설마 그거 딛고 내려가서 기둥으로 넘어가게?”
“어어. 그럴 거니까 그만 묻고 나 좀 잡아줘.”
“와, 진짜 내려가게? 미쳤음? 근데 왜 잡아줘. 바로 아래라 그냥 바위틈에 발 끼워서 내려가면 되잖아.”
“나 고소공포증 있어. 빨리 잡아봐 지금 한쪽 발만 올렸는데도 존나 무서우니까 빨리.”
“고소공포증 있으면서 그렇게 멋진 척하며 발부터 내디딘 거야? 개웃기네.”
민지는 나름 멋지게 성큼성큼 절벽 끝자락으로 다가가 바위 위에 발까지 올려놓곤 이제 와서 고소공포증 있다고 손잡아달라는 예진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예진은 빨리 잡아달라며 뻗은 오른손을 마구 흔들어댔고 민지는 알았다면서 두 손으로 예진의 오른손을 잡았다. 민지가 제 손을 잡아주자, 예진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절벽 아래로 발을 뻗었다. 일부러 기둥까지 가기 위한 길인 듯, 깎인 듯한 평평한 바위가 발끝에 닿았다. 민지는 예진의 손 풀어달라는 말이 들리자 곧바로 예진의 손을 잡았던 두 손을 풀었다. 방금까지 도로 위에 있던 작은 손이 도로 아래로 힘없이 사라졌다. 민지는 예진의 손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바닥에 엎드려 예진을 바라봤고, 예진은 천천히 바위를 밟으며 기둥의 사다리 같은 틈새에 손을 뻗었다. 오른손이 먼저 그 틈새로 들어가고 이어 왼손이, 남은 오른발과 왼발까지 완벽하게 기둥의 틈에 자리 잡았다. 손에서 저절로 땀이 흐른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거친 호흡이 묻히고 긴장감에 내뱉는 호흡이 잘게 떨려왔다. 그러다 문득, 예진은 자신의 발 아래가 궁금해졌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고개가 느릿하게 아래를 향해 숙어졌다, 다시 정면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호기심에 기껏 용기를 내본 예진은 바로 후회했다. 미친년, 저걸 왜 내려다봤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끝이 아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높은 기둥에, 예진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사다리처럼 생긴 기둥의 틈을 잡고 아래에 있는 구멍을 향해 움직였다. 틈에 쏙쏙 들어가던 발이 평평한 바닥에 맞닿았다. 조심스레 바닥을 짚고 착지하니, 예진의 눈앞에 보이는 건 자신의 몸보단 살짝 더 낮은 높이의 구멍이었다. 예진은 구멍에 도착한 걸 확인하자마자 기둥에 기대 꾹 눌러뒀던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사실 내려간 칸은 겨우 일곱 칸이었지만 체감상으론 칠십 칸은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진이 구멍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걸 확인한 민지는 덩달아 들이키기만을 반복하던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멘트 바닥이라 잘게 갈린 돌 조각 외에는 딱히 묻은 게 없다는 걸 확인한 민지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이랑과 혜림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쇳소리와도 같이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니들 지금 거기서 뭐해!”
“뭐여, 저건.”
소리에 먼저 반응한 건 이랑이었다. 혜림은 겨우 진정된 속에 소화제를 들이붓기 바빴고 민지는 눈알만 대충 굴리며 이온 음료를 들이켰다. 이랑은 차에 넣어뒀던 스프레이 파스를 손목에 뿌리며 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갤 들었다. 웬 할아버지가 열심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랑의 눈이 빠르게 그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카락은 나이와 함께 하얗게 바랬고 굽은 등과 앙상한 팔다리에, 너른한 배바지를 입은 그가 제법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런 그에게선 겉모습과는 다른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는 그를 멀뚱히 바라만 보는 셋을 향해 달려들었다.
“야! 너희 거기서 뭐 하냐고!”
검지를 한껏 치켜든 손가락이 스프레이 파스를 차 안에 도로 넣는 이랑부터 혜림, 민지를 실컷 가리키다 허공에 멈춰 섰다. 거친 쇳소리와도 같은 목소리가 점점 높게 올라갔다. 이랑은 웬 모르는 할아버지가 자신과 동생들에게 소리나 바락바락 질러대며 삿대질을 해대니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지만 나이는 저보다 많은 사람. 이랑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아니 할아버…….”
“씨발, 뭔 초면에 삿대질에 반말이야.”
이온 음료를 다 마신 민지가 이랑의 사회성 가득한 말을 잘라먹었다. 소화제를 다 마신 혜림과 기껏 동생들 앞에서 사회성 넘치는 언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마음 가다듬었던 이랑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저 또라이가. 이랑은 민지 옆에 있는 혜림을 향해 다급하게 눈빛을 보냈다. 저 미친년 또 급발진하기 전에 입 막으라고.
“아니, 곧 뒤질 것 같이 생긴 할배가 어따 대…….”
“씨발, 언니 제발.”
민지의 옆에서 당황한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혜림은 이랑의 눈빛에 다급하게 손을 뻗어 민지의 입을 막았다. 민지는 제 입을 막는 혜림의 손에 고갤 이리저리 흔들었고 이랑은 민지의 급발진에 할 말을 잃은 건지 굳은 건지 헷갈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공손한 말투로 대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 애가 아파서 사회성이 많이 떨어져요. 많이 놀라셨죠.”
이랑의 사과에, 굳어있던 그는 괜히 헛기침이나 내뱉으며 아까보단 조금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었나?”
“아, 저희는 여기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차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 할아버지는요?”
이랑은 할아버지의 물음에 성실히 대답해준 후, 본인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끊긴 도로 아래의 절벽을 제외하고 모두 높은 절벽으로 막힌 이곳의 끝자락에서 웬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밖에 생각될 수 없었다. 이랑의 물음에 그는 그저 짙은 검은색 눈동자나 이리저리 굴려 가며 이랑의 차량을 훑어봤다. 전선이 뽑힌 내비게이션,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떨어져 있는 좌석과 창문틀, 휴게소에서 산 듯한 음식들과 과자가 널브러진 뒷좌석. 제게 온 물음엔 대답 하나 없이 눈만 굴리는 것이 참 묘했다. 묘하다는 것이 기분이 몽환적이다, 어딘가 섬찟하다, 이런 것이 아닌 그냥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이랑은 살짝 찌푸린 눈썹과 함께 여기저기 훑어보는 그의 대답을 친절히 기다려주며 속으로 욕을 들이부었다.
“저기서 떨어진 건가?”
“뭐 이 임종 직……직, 직, 지금 떨어진 건 아니고 한 십 분 전에 저 절벽에서 추락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흐음…… 그렇군.”
속으로 욕이나 내뱉던 이랑은 그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속마음과 대답이 반대로 나오려다 아슬아슬하게 수습에 성공했다. 그나저나 저 할배는 왜 내 대답은 무시하고 지 할 말만 하지? 애초에 자신의 차를 보고 절벽에서 떨어졌냐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어딘가 이상하다. 어떤 차가 절벽에서 떨어져 놓곤 저렇게 깔끔하겠는가. 또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민지의 입을 계속 꾹 누른 채 눈치만 보던 혜림은 조용히 민지를 놔줬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했던 그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다시 목소릴 높였다.
“뭘 가만히 있어! 어서 돌아가!”
“네? 아, 저희 좀 놀라서 조금만 쉬었다가 돌아갈게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러는 거야!”
“아니, 그래서 제가 물어봐도 할아버지가 안 알려주셨잖아요.”
“여기는 너희가 올 곳도 아니고, 무엇보다 저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고나 말하는 거야? 저기 아래에 군인들이 있어. 잘못하면 총에 맞는다고!”
“군인들이 왜 민간인을 쏘는 거죠? 그리고 저희도 당장 가고 싶어도 보시다시피 여기 주변이 다 절벽에 바위들뿐인데 길이라도 알려주셔야지, 그것도 안 알려주시고 여기가 어디냐는 기본적인 제 질문도 무시하시더니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시는 거 기분 나쁘네요.”
제 물음엔 대답은커녕 예의 하나 안 갖춘 그의 언행에 이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최대한 목소릴 낮추며 그에게 말했다. 이랑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혜림은 옆에 있는 민지의 팔을 잡으며 이랑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저 너머로 돌려버렸다. 순식간에 몰려온 이랑의 말이 그에겐 꽤 빠른 속도였는지, 아니면 듣기도 싫다는 것인지 미간을 한껏 찌푸린 그가 입술 사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묘했던 기분 나쁨이 완전한 기분 나쁨으로 단숨에 뒤집어졌다.
“알려줘도 안 믿을 거 뻔히 보이니까 그런 거지. 이렇게 바락바락 대드는 것들은 처음 보네. 빨리 가라면 곱게 갈 것이지 어딜 어른한테 말대꾸를 꼬박꼬박……!”
“느그 애비가 그렇게 가르치든? 어딜 사람이 곱게 처 말하려고 해도 먼저 아가리를 그렇게 털어. 손가락 또 올리려고 하네, 또 올려봐. 그 손가락 느그 조상 만나러 가게 해줄게.”
데자뷰라는 말을 이런 상황에서 쓰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정적은 마치, 아까 차가 추락하고 다들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던 그 상황과도 똑같았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오만한 손가락이 다시 민지를 향해 올라가다 허공에 멈췄다. 허공에 띄워진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렸고 그의 얼굴 근육은 일그러지지도 못하겠는지 여기저기 움찔거리기만을 반복했다. 눈치만 보던 혜림은 민지의 입을 막으려다가 작게 헛기침과 함께 손을 내렸고 이랑은 이번엔 혜림에게 입을 막으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여러 생각이 겹칠 뿐이었다. 내가 동생 새끼를 참 잘 키웠구나. 아닌가. 잘 키운 건 아닌데, 분명 저건 사회성이 떨어지긴 하는데. 아니 그래도 저런 새끼한테 예의 차려가며 삿대질을 받는 건 아니긴 하지.
복잡한 정적이 네 명이 내뱉는 호흡에 뒤엉켰다. 민지, 이랑, 혜림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그나마 공통된 생각은 있었다. 그저 이 상황에서 이예진이 눈치 없이 자신들을 부르거나 소리를 내지만은 않아 주길.
“우와! 미친 거 아냐? 와, 우와, 와……. 아니 김민지! 너 빨리 이랑 언니랑 심혜림 데리고 와. 진짜 존나 신기해 여기. 와아…….”
어쩜 생각하자마자 바로 저럴까? 도로 아래에서 감탄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저 입술만 잘게 떨어만 대던 그는 눈꺼풀을 크게 들어 올려 눈알을 정신없이 굴려대며 당장 도로 끝자락으로 달려갔다. 혜림은 차 창틀에 주먹을 쥔 손을 내리쳤고, 이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마른세수를 했고, 민지는 다 마신 이온 음료 통을 거꾸로 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로 끝자락까지 달려간 그가 다시 쇳소리와도 같은 목소리로 도로 아래에 있을 예진에게 소리쳤다.
“당장 안 올라와?!”
“예?”
“올라오라고!”
“네? 누구세요?”
“진짜 단체로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그냥 올라오라고!”
“갑자기 왜 삿대질에 반말하세요……. 혹시 시비 터시는 건가요?”
예진은 기둥 안의 공간에서 얼굴만 살짝 내빼고 인상을 확 구겼다. 웬 할아버지가 제게 갑자기 삿대질에 반말에, 심지어 소리까지 치는 상황이면 당연히 기분 나쁠 수밖에. 그는 자신의 말은 죽어도 곱게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이 상황에 이미 진절머리가 난 듯, 탄성에 가까운 한숨을 마구 내뱉으며 그냥 제발 올라와달라며 어딘가의 눈치를 보듯 예진에게 작게 말했다. 예진은 웬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올라오라고 하니 슬슬 무서워졌는지, 애타는 목소리로 도로 위에 있을 제 일행을 다급하게 불렀다. 어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목소리가 도로 위까지 울려 퍼졌고, 그 애타는 목소리에 이랑은 당장 큰 목소리로 예진에게 기꺼이 대답해줬다.
“이예진! 그냥 닥치고 처 올라와!”
이랑의 소리침에, 예진 나름의 기대 품은 애타는 목소리가 기둥 속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가만히 기다리던 예진은 억울한 눈으로 자신의 위에 있을 이랑을 향해 고갤 올렸다. 나 진짜 한 거라곤 구경하다가 이름 좀 부른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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