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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A타입 (~1,500자)

1차 / 독백 / 순간_20.11.14

by 샤_ 2021. 1. 8.

 

 

 

 

이성이 감정보다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무엇보다 가문이 걸린 일이라면 이성과 감정의 갈래에서 선택이라 할 것 없이 당연히 이성을 택해야 하는 것이 맞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환은 태윤의 침소 아래에 숨겨진 서신을 쥔 채 한참을 숨만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이 서신을 다시 침소 아래에 넣느냐, 아님 제 품에 넣고 방으로 돌아가느냐. 아무도 없는 방 안은 적막으로 가득했고 그 적막 속을 가르는 제 숨소리만이 환의 귓가를 내리찍었다. 환은 전달받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태윤의 서신에서 애써 시선을 거두며 제 아랫입술만을 이로 꾹 눌러댔다. 처음부터 다 거짓이었구나.

 

검 하나 다루지 못하는 내게 다가와 알려준다며 내민 그 손도 거짓이었고, 겨우 사냥 한 번 성공한 것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손도 거짓이었고, 고뿔 걸린 제 이마에 입을 맞춰주던 그 입도 거짓이었구나. 그에게 자신의 존재까지도 거짓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헛웃음과도 같은 웃음 터트렸다. 웃음 사이로 들어오는 숨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칼날을 삼키는 고통이었고, 차오르는 눈물로 점점 흐려지는 시야가 그나마 남은 숨구멍이라도 된 양,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으려던 환은 이내 눈을 깜박이고서야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짧은 탄성을 내뱉자 그제야 터져 나오는 울음에 환은 제 아랫입술이 찢어져,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과 피가 섞여 연한 선홍색의 것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환은 그의 서신이 숨겨져 있던 그의 침소에 얼굴을 박고 무릎을 꿇은 채 숨과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태윤의 베개에 묻혀 응어리진 그의 울음과 비명과도 같은 내지름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환은 태윤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그의 서신을 품에 끌어안았다. 태윤은 처음부터 자신의 가문에 해를 가하기 위해 제게 접근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제게 그리도 잘해준 것이었고,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하니 제 마음을 온전히 받아준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고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환은 태윤이 자신의 가문에 해를 가하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환이 집중한 건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준 자신의 감정이 아닌 제게 준 그의 감정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환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환은 점점 풀리는 손끝에 최대한 힘을 주어 서신을 꽉 쥐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제 가문의 탓이었다. 그렇다면 태윤은 10년 전 그날의 피해자였겠지. 천천히 태윤의 베개에서 얼굴을 든 환은, 찌푸렸던 얼굴을 어느샌가 풀곤 서신을 쥔 손을 그의 침소 아래로 뻗었다. 침소 아래에서 도로 나온 환의 손은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때와 같이 빈손이었다. 환은 서신을 쥐었던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려둔 채 그대로 고갤 숙여, 떨리는 손끝을 주먹을 쥐어 숨겼다.

 

그에게 나의 존재가 거짓이어도 그저 그의 일부라도 됐음에 숨을 토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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