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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A타입 (~1,500자)

2차 / 가담항설 / 독백 / 봄 _ 19.11.26

by 샤_ 2021. 1. 8.

 

 

 

 

 

 

나의 눈은 날 때부터 제 기능을 못 했기에, 그만큼 다른 것들의 기능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러니 그대가 풍기는 이 비린내는 피비린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피비린내는 사람의 피가 아닌 동물의 피란 걸 아니, 그대가 백정이라는 사실 또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온 산이 복숭아꽃 천지야. 봄이 오나 봐.`

 

그대가 늘 가져오는 소식과 시는 그댈 닮은 것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예쁘고 좋은 시와 소식만 가져올까. 그대를 닮은 것들만 내게 들려주는 그대가 궁금해졌다. 

 

`울 옆엔 맑은 시냇물, 그 위엔 누대가 서 있고 대 앞에는 가득히 복사꽃이 만발했네.`

 

그대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무슨 색일까. 그대의 코와 입술은 또 어떻게 생겼을까. 그대에게 가끔 들어와도 된다고 해도 그대는 늘 거부했다. 처음부터 이유를 짐작했었기에 더는 권유하지 않았지만, 그대가 읊어주는 그댈 닮은 시를 들을 때마다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대에게서 풍기는 피비린내 사이에서 날 그대의 진짜 향은 무슨 향일까.

 

`꽃잎을 은밀하게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지 말라. 어부가 찾아들까 염려되나니.`

 

조용하던 집 안에서 쇠들이 부딪혀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던 날. 그대는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 날 끌어안고 달렸다. 그대에게 나던 피비린내가 그대의 짧은 비명과 고통에 잠긴 신음과 함께 짙어졌다. 동물의 피비린내가 아니었다. 그대의 몸이 크게 움찔거릴 때마다 피비린내는 더 짙어져,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대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대의 피비린내보다 더 짙은 암흑 속에서 그대의 향을 찾으며 말했다.

 

"...정말로 우릴 쫓는 것이 저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대는 내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호흡이 느려지고 쉬지 않고 달리던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머금고 그대의 피비린내 사이에서 그대의 향을 찾아내며, 울음 머금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우리가 죄책감보다 더 빨리 도망칠 수 없습니다."

 

나의 말에 그저 숨만 고르던 그는 고갤 숙여 끄덕이며 날 내려줬다. 그리곤 잠시만 기다리라며, 다녀오겠다며 다시 홀로 달렸다. 그대의 거친 호흡과 급한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그제야 홀로 울음을 토해냈다. 그대와 나의 끝이 보였다. 그대를 괜히 보냈나, 정말 우리가 죄책감을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이 눈은 결국 또 날 주저앉게 하는구나. 아니, 이번엔 우릴 주저앉게 하는구나. 그러다 나는 이미 피와 흙으로 더럽혀진 듯, 축축하고 까슬까슬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정말 날 주저앉게 했던 것이 이 눈이었을까. 난 이 눈을 핑계 삼지 않았던 것일까. 비록 나의 눈은 남들과는 달랐지만, 나의 타고난 코와 귀 또한 남들과 다르지 않았던가.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숙였던 허릴 들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복사꽃 향을 맡았다. 우린 죄책감을 이길 순 없지만, 다시 시작할 수도 끝을 낼 수도 있지. 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울음을 참았다.

 

저 멀리서 그대의 발소리가 들린다. 느려진 발소리와 짙어진 피비린내에, 나는 그저 내게 안겨 오는 그댈 끌어안았다. 그대의 등에 깊게 파고든 화살과 그대의 흐느끼는 신음과 울음에. 나는 그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기껏 참아낸 울음이 다시 흘렀고, 그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끝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 순간과 함께, 그대와 나는 그대로 절벽 아래의 복사꽃이 가득한 봄의 계절로 떨어졌다.

 

 

***

 

 

그대의 향기가 비로소 피비린내와 복사꽃 향을 이기고 풍겨왔다. 그대의 향은 내가 맡아본 그 어떤 봄보다 더 산뜻한 향이었다. 복사꽃보단 옅지만, 그 어떤 계절보다 가장 산뜻한 봄의 향이 온 산을 뒤덮었구나. 그 향이 그대의 머리카락에서, 눈에서, 손끝에서 풍겨 날 뒤덮으니. 내겐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계절이 오래전부터 내게 왔음을 그제야 알았네. 

 

아아, 그대가 나의 봄이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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