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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눈이 마주쳤었다. 저와 같은 붉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쓸어넘기며 길을 건너던 자신과는 달리 아늑한 조명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던 그들. 기분이 참 묘하다. 이젠 성도 족보도 다른 이들인데. 흘끗흘끗 찾아가 한없이 여린 정 붙들고 몰래 훔쳐보던 때는 훌쩍 지났는데. 일그러진 미간을 추위와 피로 뻣뻣해진 손으로 풀어낸다.
태현은 여전히 제 손가락 사이에 남은 굳은 피를 손톱으로 떼어냈다. 굳은 피는 제 손톱에 진득하게 묻어나지도 않고 단번에 떼지더니 그대로 차가운 시멘트 위로 떨어졌다. 그는 어딘가 찝찝한 손톱과 손가락 끝들을 손바닥에 문지르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느릿하게 이어나갔다. 그 새끼가 오늘은 해도 뜨고 밤엔 안 춥다고 했었는데. 검은 셔츠 하나와 발목이 드러나는 흰 정장 바지. 매일 아침 기상예보를 읊는 조직원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듣고 입은 옷들이다. 차가운 바람이 얇은 셔츠 너머로 밀려들어 온다. 바람이 얼마나 센 지, 제 살에 날이 선 칼이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어붙은 입술을 벌려 숨을 토해낼 때마다 탁한 입김이 피어오른다. 아, 유래원이 금연하랬는데.
탁한 입김이 피어올라 바람과 함께 저 뒤로 날아가 버리는 걸 보니 저절로 참고 있던 담배가 떠올랐다. 태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혼자 고갤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바람이 세니 대충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때마침 왼쪽 대각선에 좁은 골목길 하나가 보인다. 끝은 벽으로 막혀있고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갔는지 바닥엔 찌그러진 담배꽁초가 여럿 보였다. 느릿한 걸음은 자연스레 골목 끝자락으로 들어가고 추위에 붉게 물든 길쭉한 손가락은 능숙하게 바지 주머니를 뒤진다. 뒷주머니에 딱 맞게 들어가 있던 네모난 담뱃갑 하나와 길쭉한 플라스틱 라이터 하나.
칙, 칙, 칙.
아, 씨발. 하필 다 쓴 라이터였는지 그의 손가락이 아무리 라이터의 버튼을 눌러대도 불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태현은 그나마 나아질 것만 같던 기분이 단숨에 내려앉았는지 짧게 욕을 읊조렸다. 그리곤 신경질적으로 텅 빈 플라스틱 라이터를 바닥에 내던졌다. 느슨해졌던 미간은 다시 찌푸려지고 담배 연기나 흘러나와야 했던 입술 사이론 탁한 입김만 흘러나온다. 태현은 제 입술 사이에 물려있던 담배 한 개비를 다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며 계속해서 욕이나 내뱉었다. 뭔 날씨가 풀려, 좆같은 새끼가. 돌아가면 그 낡은 면상 얼음물에 담가버릴 거야. 호로새끼…… 지랄 맞은 새끼들…… 쓰레기 같은 놈들…….
대상이 특정되어 있던 욕이 점점 대상이 흐려진다. 누굴 향한 욕인지 저 자신마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담배 연기를 대신하는 제 입김과 함께 욕을 내뱉었다. 이렇게 욕이라도 토해내야 좀 살겠다는 듯, 한 손으로 한껏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셔츠 하나 걸친 등이 차가운 벽에 닿는다. 오래됐는지 울퉁불퉁한 차갑고 낡은 회색 벽에. 등과 함께 엉덩이를 그곳에 붙이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주저앉는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저절로 바닥에 닿더니 그대로 힘이 빠져버렸다. 골목 안까지 이젠 바람이 들어온다. 차가운 바람이 제 몸을 감싸고 제 살을 베어낸다. 점점 추위에 무감각해지고 정신이 멍해진다. 차라리 이대로 잠이나 들고 싶은, 그런 기분이기에 태현은 천천히 제 눈꺼풀을 내렸다.
“여기서 자려고?”
세차게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제 느릿한 숨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던 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다 감겨가던 태현의 눈꺼풀은 놀란 듯 떠졌고, 붉은 눈동자는 그대로 고개와 함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아까 전, 그가 골목에 들어올 때 들어섰던 골목 입구. 그곳에서 절 바라보는 흰 눈동자에, 태현은 멍하니 절 내려다보는 흰 눈동자만을 올려다봤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진 추위도 안 느껴지고 아무런 감각도 없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추위에 온몸이 떨린다. 얼어붙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한껏 일그러진 눈가가 뜨거워진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자신의 몸이 이러는 이유를 이미 태현은 알고 있는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절 내려다보는 흰 눈동자에 한 손을 내밀었다.
“유래원.”
“왜 불러, 우리 노숙자.”
“하, 노숙자 아니거든?”
“그럼 왜 거기 앉아있어. 그렇게 입어놓곤 안 추워?”
“추워. 존나 추워, 진짜. 그니까 나 좀 안아봐.”
그때처럼 안아줘. 내게 칼을 쥐여주던 때처럼, 내 손에 과일 맛 사탕이나 쥐여줬던 그때처럼. 네 품에 날 넣어줘. 태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뻗어져 있던 얼어붙은 그의 손에 따스한 래원의 손이 맞닿았다. 미치도록 아늑해 보이던 식당 조명이 제 입김과 함께 흩어진다. 태현은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궜다. 그리곤 그 손으로 절 품에 안은 래원을 한껏 끌어안았다. 차가운 제 손이 아닌 따스한 그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숨을 토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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